요한 사도가 복음서의 말미에서 이 복음서를 작성한 목적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고 그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는데, 복음서의 초두에서는 이 목적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는지를 밝혔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1:18)

인생이 스스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인생이 죄 아래 있는 사실이고, 이것이 죄로 말미암은 죽음의 상태입니다. 심지어 죄가 없더라도 인생 스스로는 감히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없고 인생 스스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지으시고 먼저 인생 가까이로 내려오신 까닭에 창세 때에 우리 시조가 하나님을 가까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인생이 아담 안에서 범죄한 이후로는 하나님이 아무리 지으신 만물을 유지 보존하시는 일로 계시하시더라도 인생은 오히려 자기 속에 가득한 불의로 하나님의 진리를 억눌러 버릴 뿐입니다. 하나님 대신 피조물을 섬길 뿐입니다. 심지어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속 은혜를 맛보고 특별 계시를 받았어도, 자기를 구원하러 오신 메시아를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기나긴 역사는 우리 인생이 얼마나 죄인인지, 얼마나 어둠 가운데 처하여 있는지 웅변할 따름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는 말씀은 한낱 인생의 비참한 형편과 두려운 처지를 잘 보여 줍니다. 바울 사도가 시편을 인용하여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하고 선언한 그대로입니다. 사실 이 위대한 진리를 선언한 바울 선생 자신이 좋은 예가 아니었습니까? 구약 율법에 정통한 청년 사울이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면서 결국 행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교회를 이 땅에서 말살하려는 것 아니었습니까? 거룩한 교회가 말살되면 하나님을 만날 길은 영영 없어지는 것 아닙니까? 구약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에 관하여 조금 안 것이 있었는데, 그 지식은 이방인과 같이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무지보다도 훨씬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지식이라면 아예 지식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없을 정도 아닙니까?
이런 사실 위에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명백합니다. 인생이 스스로 하나님을 볼 수 없고 알 수도 없다는 것이고, 인생이 하나님을 뵐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께서 친히 하나님을 계시해 주셔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계시를 깨달아 하나님을 믿게 해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한낱 피조물이어서 감히 하나님께 다가갈 수 없으니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가까이해 주셔야 할 뿐만 아니라, 인생이 죄로 말미암아 심히 어두워져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거룩한 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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