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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도에게 요구되는 독립적인 연구 태도 (최낙재 목사)

 

이 글은 1982년 11월 11일 합동신학교(현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개교 2주년 기념행사에서 행한 특별 강연의 내용이다. 당시 합동신학교에서 신약학을 가르쳤던 저자의 특강은 「합동신학보」에 게재되었는데, 퇴고하여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보라』(성약출판사, 2007년 12월)에 실었던 것을 여기에 옮겨 싣는다.



여러분은 다 신학도(神學徒)이고 이 사람도 신학도로 공부하면서 형성된 태도가 있는데 그 신학도의 태도를 언제나 포기할 마음이 없고 오히려 남에게도 권장할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이 제목으로 이야기하려 합니다.

 

우리의 이야기는 먼저 믿음에서 시작하겠습니다. 어떠한 학문뿐만 아니라 우리 생(生) 전체가 창조주시요 구주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떠나서는 무엇이든지 제대로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범(非凡)한 믿음의 사람인 아브라함


믿음이라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예와 그 모범을 먼저 생각함이 좋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생 전체를 놓고 볼 때, 하나님을 신실히 믿고 순종하였으며 따라서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것에 대하여는 매우 독립적이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의지하지 아니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갈대아 우르를 떠나야 했을 때 그는 떠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우르라 할 것 같으면 고대 문명이 찬란히 꽃피었던 곳으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거기에 살기 좋은 문명이 있었고 친척과 아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그곳은 삶의 기반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분의 경영하시는 바를 위해서 부모와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멀리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실 때, 그 가는 곳이 낯설고 개척지가 될지라도, 그는 서슴지 않고 많은 권속을 거느리고 그리로 떠났던 것입니다. 이를 두고 곰곰이 생각할 때 그것은 큰 믿음이었음을 우리가 시인하게 됩니다.


그 후에 그가 가나안에 거하는데, 동방(東方)에서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 연합군과 함께 와서 소돔과 고모라를 치고 돌아갔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가 기른 사병 318인을 거느리고 나가서 그 대군을 치고서 구해 왔습니다. 엘람 왕은 이 먼 곳까지 통치했던 왕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고을들이 십수 년 동안 그를 섬겨 오다가 반역을 할 때 거기에 원정을 나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먼 곳까지 다스리다가 또한 원정까지 나올 수 있는 그런 세력이란 두려운 세력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런 마음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그러한 대군을 물리치고 조카를 구하여 오는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도무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의 이런 두어 가지만 생각하더라도 그는 과연 비범한 신앙의 소유자였다 하는 것을 우리가 넉넉히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어느 세력이나 누구에게 예속되지 않고 독립적인 길을 걸어갔음을 주의하게 됩니다. ‘신앙’과 ‘독립 정신’이란 이와 같이 항상 병행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9에 보면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큰 집을 짓고 살지 않고 나그네처럼 장막 생활을 한 것을 믿음이라 했습니다.


‘가나안은 나에게 주신 땅이다’ 하여 무력을 사용하여 점령하지를 않았습니다. 아모리 사람 원주민(原住民)의 죄악이 아직 관영(貫盈)치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대로 두시는 것을 알고 그들과 나란히 살며 선린(善隣) 관계를 가졌는데, 그러나 그들에게 결코 예속(隸屬)되거나 그들의 죄악에 타협하지 아니하고 살았습니다. 그들과 나란히, 그러나 독립하여 살았음을 우리가 관찰할 수 있습니다. 헷 족속이 한번은 아브라함에게 ‘당신은 우리 중 하나님의 방백(方伯)이십니다’(창 23:6)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런 말을 원주민에게서 듣고 산 사람입니다. 그가 자기 아내의 매장지(埋葬地)를 구하려 할 때에 ‘하나님이 세워 주신 방백’이라 하는 말을 그들이 했습니다. 그들은 원주민이고 아브라함은 나그네로 갓 들어온 사람인데도 그들이 아브라함을 존경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들 가운데 있음으로써 외적에 대하여 방패가 됨을 그들이 시인하고 고맙게 생각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토박이의 위치와 세력에 눌려 살지 않고 당당히 살았습니다. 조금도 꿀리는 일이 없이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기드온의 믿음


신앙과 독립성은 병행하는 것임을 우리는 또한 기드온에게서도 봅니다. 그는 미디안 족속 치하에 살고 있는 자기의 미약함을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부지런히 땀 흘려 곡식을 생산해 놓은 것을 미디안 군인이 추수 때마다 와서 삽시간에 착취해 가는 횡포를 견딜 수 없었으나 그는 자기의 미약함을 절실히 알았기 때문에 그들을 물리칠 엄두를 못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돌아보아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삿 6:14) 하실 때 그 말씀을 듣고 그는 일어나 구원의 일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의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일은 군대나 군대의 수를 의지하지 않은 것이 특징입니다. 모여든 3만 2천이란 많은 군중을 의지하지 않고 그들을 다 돌려보낸 후 겨우 3백 명으로 13만 5천의 대군을 쫓아냈습니다. 400:1이 넘는 대군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이런 싸움은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태도는 신약의 모든 신앙 인물들에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신약에서 가르치기를 갈라디아서 5:1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처럼 믿음을 잘 가르친 책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일하셨다’고 가르칩니다. 고린도전서 7:23에는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신앙은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종이 되지 않고 독립을 부대(附帶)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에게는 정치적 혹은 경제적인 독립뿐 아니라 종교적․사상적인 독립이 필요합니다.


 

창조주에게서 독립하려는 것은 오만임

 

흔히 안 믿는 친구들이 믿는 사람을 향하여 “왜 너는 사람이 되어서, 특별히 남아가 되어서 네 힘으로 독립해서 살지 못하고 타력(他力)을 의지하려고 하느냐? 왜 믿느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잘 분석해 보면 그 저변에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인생을 스스로 운전하고 가겠다 하는 타락한 인간의 오만이 거기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스스로 충족하게 여긴다 할지라도 인본주의의 아성인 그리스 문화가 추천하는 영웅들을 볼 것 같으면 모두 무기력합니다. 영웅이라 하지만 모두 하나같이 ‘운명’이라는 신 앞에 무력한 인간상(人間像)을 그리스 문학은 그려 놓고 있습니다. 신들도 운명의 신(Fate) 앞에서는 꼼짝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 인간 영웅들은 이 막강한 운명의 신 앞에 항복하고, 자기 운명을 타개하지 못했습니다. 타력을 의지함 없이 스스로 자기의 길을 개척하고 나가겠다는 이 인간의 오만은 얼마 못 가서 자멸하고 마는 것입니다. 창조주에게서까지 독립하여서 스스로 자기의 길을 가겠다 하는 것 그것이 곧 오만입니다. 그것을 고집하고 나갈 때에는 그 결과와 그 열매를 그들이 다 맛보고야 말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서, 타인에게서 독립하고 나가겠다 하면 그것이야 추장(推奬)할 태도이겠지만 창조주에게서까지 독립하려고 하는 것은 오만입니다.


 

무기력한 신앙생활이 비난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아닌가

 

다음으로 또 하나의 요소를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왜 타력을 의지하느냐’ 하는 이 질문, 질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비난이 되겠는데, 이 비난은 또 하나의 이유에서 나옵니다. 그것은 믿는 사람들의 무능과 무기력에 대한 화살입니다. 그들의 생활 태도가 세상 앞에 확신과 평안과 기쁨과 희망 대신 우유부단과 무기력과 비굴과 패배 의식 등을 노출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보고 안 믿는 친구들이 그렇게 힐난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되돌아봅니다.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래서 일반 생활 태도에서 아브라함처럼 그렇게 당당한 면이 있었더라면, 과연 친구들이 그런 오만의 말을, 인간의 한계를 넘는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을 것인가? 믿는 사람들 편에 그런 말을 들을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는 갈 길을 모르고 힘을 낼 수 없고 절망하지 않을 수 없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는 다른 모습을 띠어야 할 것입니다. 믿는 자라면 아브라함의 후예요, 따라서 아브라함의 행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에게도 신앙의 기복(起伏)이 있었습니다만, 전체로 볼 때 그는 누가 함부로 할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든든히 서 있었던 사람입니다. 세상의 어떤 세력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해서 홀로 설 수 있었던 사람이고 평생토록 홀로 서서 나갔던 사람입니다.


 

계시 의존(啓示依存)은 사람으로부터 독립하게 함

 

신학을 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은 하나님께서 어떠하신 분인 것과, 무슨 일을 하셨고, 무슨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시는지, 또 무슨 일을 앞으로 하시려는지에 대하여서 계시하신 말씀을 토대로 거기 근거하여서 하나님을 배우는 학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말씀만을 믿는 것으로써 인간의 권위로부터 독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큰 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있으므로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음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에게 무한한 진리의 보고(寶庫)가 됩니다. 진리를 찾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무한한 진리의 보고가 과연 자기에게 진리의 보고가 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조건이 있습니다. 그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요, 그 권위만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사상이나 철학이나 어떤 전통이나 그와 같은 권위에 의존함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의 권위로 여기고 배워 나가야 진리의 보고를 자기의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진리를 규명(糾明)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가서 거기서 확증을 얻기까지는 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렵고 아주 힘듭니다. 그것은 고식적(姑息的)인 연구 태도로는 되지 않습니다. 아주 창의적(創意的)인 것입니다. 어떤 유행하는 이론이라 할지라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가 그 이론의 뒤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통째로 삼킬 수는 없습니다. 일단 내가 그 문제를 가지고 씨름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것과 함께 생각해서 그 빛으로 해답을 얻고서야 결론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여 얻은 지식은 귀중하고 또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유행하는 사람의 사상과 이론은 바람에 밀리는 파도와 같습니다. 시대에 따라 변하고 요동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진리의 지식은 모든 교훈의 풍조가 밀려와도 의연히 버티고 나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최종의 권위로 인정하고 지식을 쌓아 나가는 것이 믿는 사람의 할 일이요, 특히 신학도의 할 일인데 그것의 좋은 모범을 사도행전 17:11 이하에서 볼 수 있습니다. 거기서 바울 사도가 베뢰아에 갔을 때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함으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였습니다. 거기 보면 첫째로 바울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새로이 온 계시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베뢰아 사람들은 받았다고 했습니다. 받는 과정에는 분명히 그들의 사유(思惟)의 작용이 있습니다. 이성의 활동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이성이 심판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지를 않고 그것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성을 무시하거나 그것의 활동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의 활동이 필요하고, 그것이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성이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서 ‘어디 그것이 진리인가 한번 따져 보자’ 하는 태도는 그릇된 것입니다. 그런 태도로는 결단코 사람이 진리에 이르지 못합니다. 사람의 이성이 매우 우수한 기능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까지 판단하고 논하는 그런 일을 하라 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이성의 능력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이성의 모든 활동을 부지런히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그것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이성보다도 성경에 더 의존하였습니다. 성경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새로운 계시를 받을 때에도 이미 그들이 의존하던 진리의 터가 되는 구약 성경을 그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계시는 서로 동질성(homogeneity)을 갖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새로이 계시가 올 때 이전에 있었던 계시에 비추어서 받는 것입니다. 전에 내려 주신 계시와 새로 들려주는 계시가 동질성이 있어야 거기 비추어서 받게 되는 것이고, 아예 다른 것을 가지고 온다면 먼저 것에 비추어서 바로 ‘아, 그렇지 않다’ 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베뢰아 성도보다 복된 위치에 있음


이 사실을 놓고 볼 때 오늘날은 이 계시의 말씀이 그 베뢰아 사람들에게보다도 훨씬 더 풍성하게 우리에게 있는 것을 발견하며, 우리가 훨씬 더 복되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베뢰아 사람들에게는 직접 바울 사도가 찾아가서 육성으로 들려줬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또한 구약도 있었다. 그러니까 얼마나 그들이 복되냐’ 하고 부럽게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좀 더 냉정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훨씬 더 복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갖지 못했던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는 훨씬 더 풍부하게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겨우 바울의 몇 마디가 아니고 우리는 여러 서신을 가지고 있고, 다른 사도들과 다른 하나님의 종들이 가르친 말씀을 우리는 더 풍성히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복을 복으로 아는 것입니다. 큰 보화를 가지고도 그것이 복인 줄 알지 못한다면 자기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가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우리는 듣습니다. 박물관장에게 알려졌으면 큰 보화가 됐을 텐데 문외한이 벽장 구석에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묵혀 두는 그런 글씨라든지 그림이라든지 혹은 서적이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옆에 가지고 있어도 그것의 귀중함을 알지 못하는 동안에는 효력이 나타나지 않고 그냥 사장(死藏)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비교할 수 없는, 어디 다른 데서 찾을 수 없는 보화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다면 이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서 은혜와 진리 가운데서 자꾸자꾸 자라 가야 할 것입니다.


 

‘예언 기도 받는다’는 말은 어불성설(語不成說)


그런데 어떤 경우에, 믿는다는 부모가 자기 자식이 이제 대학 입시라는 중요한 인생의 과정을 앞에 두고 어떻게 될 것인가 염려한 나머지 그를 데리고 예언 기도를 받으러 간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예언이면 예언이지 어떻게 기도입니까? 예언 기도라? 또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 어떻게 받는 것입니까? 뜻을 모르기 때문에 어불성설(語不成說)인 술어(述語)들을 씁니다. 또 그런 곳에 가는 그 심리는 무엇입니까? 직접 하나님에게 계시를 받아 보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녀의 앞을 내다볼 때 불안하고 그의 길은 막연하고 하니 직접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면 시원할 것 같아서 그리로 가겠다 하는 심리입니다. 부모가 확신을 가지고 살고 자녀도 그리로 인도하여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합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믿는 사람뿐만 아니고 안 믿는 사람도 가지는 심정이올시다. 사람이 하나님 없이 홀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반증(反證)하는 사례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는 사람이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비극적인 사실입니다. 인생이 그러한 존재임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부족함이 없이 인도하시려고 말씀을 주셨고 그것을 그 곁에 쌓아 두셨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그것을 무시하고 그런 데 쫓아다닙니다. 이것은 참으로 큰 비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점쟁이를 큰 죄로 여기시고 그런 것을 하나님의 나라에는 있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점쟁이를 쫓아내라!’ 하셨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대치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것을 따르다가는 망하는 것입니다. 점쟁이에게 가는 것, 그것이 작은 일인 줄 아십니까? 그러나 요새 하는 예언 기도라는 것은 이름만 점(占)이 아니지 사실은 똑같습니다. 어떤 학생이 아직 신앙이 깊지 못하여 자기 부모에게 끌려서 ‘예언 기도’라는 것을 받았는데, 예언 기도를 하는 사람이 점쟁이와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예언 기도를 받는 것이 점쟁이에게 가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우리 곁엔 무진장한 진리의 보고(寶庫)가 있어


하나님께서는 무진장(無盡藏)한 진리의 보고(寶庫)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금방 하나님에게서 무슨 말씀이 내려와야만 고귀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고귀하겠지만, 이미 내려와서 그것을 찾아서 알 수 있도록 해 놓으셨다면 그 가치가 지금 바로 나온 것하고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서 바울 사도를 통해서 말씀이 들려온 것과 그 말씀을 잘 담아서 충분히 알 수 있도록 글로 써 놓은 것이 어떻게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당장 어떤 사람의 입을 통해서 나오면 그것은 진리이고 계시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종을 사용하여서 우리가 읽고 생각할 수 있도록 확실하게 준비해 놓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치고 그 말씀을 최종의 권위로 여기는 그런 태도는 일종의 순환 논법(tautology)이 아니냐’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좀 더 문제를 좁혀서, 이제 방법을 논의할 때 ‘정경(正經)이 정경이 되는 근거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요 정경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할 것인가, 아니면 ‘교회가 정경으로 정하였기 때문이다’ 또는 ‘성경의 내용을 검토해 보니까 어떤 정경의 기준에 맞는다. 모든 성경의 각 권이 성경의 정경의 기준에 맞는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경이다’ 그렇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신약 총론 서론에서 정경을 논할 때 여러분이 다 한번씩 씨름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정경이다, 정경이니까 정경이다, 하는 그런 논법은 순환 논법이 아니냐? 그 근거가 다른 데 있지 않고 그 자체 내에 있으니까 순환 논법이 아니냐?’ 그렇게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에는 ‘이것은 순환 논법이므로 존중할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은 세상에 나올 때부터 정경(正經)임


그러나 독특한 경우에, 절대적인 권위의 문제에서는 그런 논증이 가치가 없지 않고 오히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정경은 기록되는 순간에, 이 세상에 나올 때부터 벌써 정경으로서 권위를 지니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 후 교회가 신약 전체를 정경으로 받는 과정은 성경으로 인정하는 과정으로서 우리가 연구할 가치가 있지만, 397년 카르타고 회의에서 정경이 이루어졌다든지 혹은 그때에 정경을 만들었다든지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일 성경이 어느 사람이나 교회의 증언에 의해서 정경이 됐다고 한다면 정경의 권위는 벌써 그 사람이나 교회로 옮겨지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에 나올 때부터 정경이라는 주장이 언뜻 보기에 순환 논법이지만 그 이외에 달리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최고의 권위의 문제를 우리가 생각할 때는 자연히 그렇게 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가 말하듯이 성경의 권위는 하나님께서 그 저자가 되시는 사실에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곧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사실에 그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외부적인 어떤 근거를 찾고 외부 어디서 성경의 권위를 찾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서 지식을 쌓아 간다는 이 원칙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해석하는 데 잘 적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이 알도록 말과 글로 표현이 되었으니까 말의 일반적인 연구 방법을 따라서 단어의 뜻도 혹은 그 어원도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문법과 문학적인 관점에서 그것을 연구하여야 할 것이고 또한 역사에도 비춰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계시이기 때문에 계시성을 무시하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계시는 일시에 다 계시하신 것이 아니고 장구한 시대를 두고 역사가 진행함에 따라서 처음에는 씨앗이요, 다음에는 줄기요, 다음은 가지요, 거기에 맺힌 열매의 형태로서 그리스도에게서 완성이 되었고, 거기에 따라서 구약과 신약의 성경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따라서 어느 한 구절이나 한 시기의 계시 내용을 전체에서 떼어내면 올바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이단들입니다. 그들이 그런 짓들을 잘하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한 구절을 이해하는 데에는 시대마다 발전해서 전개된 전(全) 계시의 일부분으로서 어느 한 구절의 계시의 말씀의 내용을 파악하고, 그 전체와의 관련 속에서 이해하려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물론 그 구절 자체를 우리가 연구해야겠지만 항상 전체와 관련해서 연구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할례라 하는 것은 매우 귀중한 예식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는 그것을 받지 아니하면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만큼 중요한 예식입니다. 그렇지만 사도 시대에는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 하고 그것을 고집한다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이 됩니다. 이 한 예만 보더라도 어느 한 구절이나 한 문제만을 가지고 문자 풀이를 한다든지 그 한 시대에 국한해서 연구하면 안 된다 하는 것을 뚜렷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할례의 의미는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에 가서 배워야 할 것이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견주어서 그 일부로서 그 관련하에서 연구해야 할 것이고, 그것만 따로 떼어 가지고서 연구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고대 근동 문화를 연구하여서 할례에 참고가 되는 것을 얻을 수 있겠으나 거기에서 정확한 해석의 열쇠를 기대하는 것은 큰 오산입니다. 그 비슷한 예가 아브라함 당시라든지 근동에 많이 있었으니까 그것과 비교해서 연구하면 근본 뜻을 알겠다 해서 그쪽으로 향해서 연구를 하고 거기에서만 해답을 얻으려고 한다면 큰 오산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공부를 전연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고대 근동에 대한 연구에서 우리가 배울 것들도 있지만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그 구절의 진의를 알아내는 해석의 핵심적인 열쇠를 성경 자체에서 찾는 것입니다. 다른 계시와 관련하여서 어떤 구절의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것이 신앙의 태도요,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지식을 추구하는 태도인데, 이것이 또한 정당하고 효과적인 연구 태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에는 자기 부인의 성찰과 하나님의 말씀을 부단히 사모하고 연구하는 큰 노력이 따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서는 태도가 요청됩니다. 그러니까 많이는 이러한 길을 택하지 아니하고 쉬운 길을 택해서 나아갑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자기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거나 자기보다 훨씬 더 앞서서 공부를 많이 한 학자들이나 그런 사람들의 이론에 그냥 의지하고 말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연구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을 다 공부해야 할 것이지만, 최종적으로 생명의 지식을 자기의 것으로 삼는 것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가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게 살아갈 것인가, 생명의 길을 걸어갈 것인가를 확신하면서 연구하려면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아, 이것이 진리구나. 이것이 참이구나’ 하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훨씬 더 큰 노력이 필요하고 끈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하지 못하면 결국 인간의 권위에 의존하고 말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과 일반 학문

 

이러한 태도는 또한 의혹과 의문을 일으킵니다. ‘그러면 이 독립적 연구 태도란 일반 학문이나 교회사나 과거 교회의 신앙고백 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러한 결론에 이르지 않고, 만일 그런 결론에 이르렀다면 오해에서 생긴 것입니다. 첫째로, 여기서 말하는 독립적인 연구 태도라 하는 것은 일반 학문의 권위 위에 진리의 지식을 수립하지 않고 거기서 독립한다는 뜻이지 결코 일반 학문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광범한 영역을 인정합니다. 특별한 계시 이외에도 하나님께서는 일반적인 계시를 세상의 믿는 사람뿐 아니라 믿지 아니하는 모든 사람에게 주셔서 그것으로 인해서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모든 일에 빛으로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교회사(敎會史)에 대한 태도


둘째로, 특히 교회사는 성신께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교회를 시대마다 어떤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셨는가를 우리에게 가르치므로 구약과 신약에서 배우는 진리가 그 백성의 생활 가운데서 실증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우리가 ‘교회사에서 눈을 돌리고 성경으로 직접 간다’ 하는 입장만 취한다면, 때때로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성경으로 돌아가자’ 하는 구호를 앞세우고 교회의 역사를 무시한다면 이것은 성신께서 대대로 교회를 양육하신 그 일과 그 안에 쌓으신 그 지혜를 다 무(無)로 돌리고 새로 시작하겠다는 무모함이요 배은망덕을 저지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신비주의는 이런 오류에 빠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정당하게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 말씀이 인간 사회 안에서 적용된 실례(實例)들을 결코 무시하지 않습니다. 과거 2천 년 동안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인도하셨는가 하는 사실을 결코 무시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역사의 주이시고, 역사가 그냥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주장(主掌)하셔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를 무의미하게 볼 수 없습니다. 특별히 교회사를 무의미하고 없는 것같이 결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성신께서 하신 일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교회 안에서 진리가 모든 오류 가운데서 시련을 다 겪고, 오류를 다 물리치고서 진리로 입증된 사실을 우리가 한마디로 무시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앙고백(信仰告白)에 대한 태도

 

셋째로, 신앙고백 역시 우리가 무시할 수 없습니다. 종교개혁은 교황이나 종교 회의를 넘어서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고 우리의 신앙이 거기에만 근거함을 선언하였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종교 회의나 혹은 거기에서 고백한 신앙고백을 무시한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시대는 교리를 무시하고 또한 신앙고백 없이도 교회가 설 수 있다고 오해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경향이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감정적으로 흐르고, 확실히 알고 행동하려는 그런 기풍이 땅에서 떠나는 데에 큰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신앙고백이 문서로만 구호로만 남고, 산 신앙이 없는 폐단의 결과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이 껍데기로만 남아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제는 ‘신앙고백을 내세워도 별것이 없더라’ 하고 말합니다. 그 결과 신앙고백의 권위가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신앙고백이란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무시한다면 그동안에 여러 교회에서 고백한 신앙고백이나 그들이 여러 논쟁을 거쳐서 수립해 놓은 여러 교리들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기독론, 신론, 구원론, 교회론 등 과거 교회가 큰 시련 속에서 찾고 정리하고 변호하여서 우리에게 물려준 보편 교회의 진리의 보화를 하루아침에 던져 버리고 새로 시작하겠다는 것이 됩니다. ‘전대(前代)의 교회는 우리만 못하다’, ‘그 사람들의 생각을 무시하고 우리가 새로이 성경을 연구해서 진리를 캐야겠다’ 하는 것이 됩니다. 성경으로 돌아간다는 그 취지는 좋고 그 뜻은 좋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보편의 교회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만 믿는 사람이 아니고 이 시대의 교회만이 교회의 전부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편의 교회를 유지하시고 보존하시고 교회와 교회 사이에도 서로 한 몸의 뜻을 잘 이루도록 해서 이 교회가 저 교회에, 저 교회가 이 교회에 대하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한 몸의 구실을 하도록 정해 놓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뜻에서도 전대의 교회가 가졌던 신앙고백을 다 무시하는 것이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존중하지만 그러나 신앙고백의 표현은 역시 교회의 소산이요, 따라서 성경 자체의 위치에 나란히 놓을 수는 없습니다. 루터 자신도 종교 회의를 무시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최고의 권위는 역시 하나님의 말씀 거기에만 있기 때문에 거기에 굴복하지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종교 회의라 할지라도 거기에 승복할 수 없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신앙고백을 존중해야 하고 존중하는데, 그것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받고 믿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어떤 성도는 이런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하고 ‘우리도 우리 시대에 맞는 신앙고백을 작성할 수 있다. 장로교인이라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믿을 뿐 아니라 그보다 더 뛰어난 신앙고백을 작성할 수 있다’고 원칙은 그렇게 말하였지만, 그러나 20세기의 교회의 역량을 평가해 볼 때 이 시대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보다 뛰어난 그러한 신앙고백을 만들 역량이 없다고 평가한 것을 압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경성(警省)하여 우리의 신앙과 신학이 사람의 지혜와 사람의 권위에 세워질까 조심하고 애써 하나님의 말씀의 확인을 받기까지 쉬지 않아야겠습니다. 누가 이렇게 말하였다, 누가 이렇게 해석했다, 그런 것으로 우리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러한 훌륭한 해석가와 설교자들, 주석가들을 하나님께서 쓰시니 그런 것을 전연 무시하고 독불장군 식으로 나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종이고 사람입니다. 그들이 연구한 것을 충분히 존중하고 연구하고 배워야 하되 최종적인 권위는 항상 성경에 있는 것이고 거기까지 가야 합니다. 우리는 애써서 노력을 기울여서 하나님의 말씀의 확인을 받을 때까지 쉬지 아니하고 거기를 향해서 나가야 하겠습니다.


 

내 이성(理性)에서도 독립(獨立)해야

 

교회, 곧 하나님의 집이 무너지지 않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는 길이요,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권위를 최고의 권위로 알고 거기에 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동시에 사람의 어떤 이론이나 사람의 사상에 의존하지 아니하고 독립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여서 서는 것입니다. 나도 여러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니까 내 이성이나 내 생각에서도 독립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존하고 믿는다 할 때는 그것을 포함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나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이런 것을 다 사로잡아서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다 그래야 할 것이고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을 지도하며 교회를 먹이는 목사들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든든히 서는 데에 교회가 든든히 서는 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주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漲水)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柱礎)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마 7:24-27)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전적으로 믿고 겸손히 그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인간의 모든 권위에서 독립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살 길이 있고 신학도가 가져야 할 연구 태도가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