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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전 목사 (강설) downloadpdf.gif

· 1강  |  찬송에 대하여(1) |  행 16:14-40  |  성약교회 1970. 4. 26.

· 2강  |  찬송에 대하여(2) |  성약교회 1974. 5. 14. 


    ▥ 최낙재 목사 (강설) downloadpdf.gif

· 1강  |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이까?  |  사도행전 1:1-11

· 2강  |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  사도행전 2:14-47

· 3강  |  이스라엘 나라는 오로지 성신의 능력으로 회복됨  |  히브리서 1:1-14 

· 4강  |  다윗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  마태복음 22:41-46

· 5강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  |  로마서 10:9-17



2)

김홍전 목사  |  찬송에 대하여 (I)  |  행 16:14-40  |  성약교회 1970. 4. 26.  |  성은교회 1994. 7. 13.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 사도행전 16:11부터 그 장 마지막 40절까지 읽었습니다. 여기는 사도 바울 선생이 제 둘째번으로 전도 여행을 했을 때 처음으로 아시아 도(道)를 떠나서 유럽으로 들어갔는데, 그건 헬라의 마게도니아 땅인데 마게도니아의 빌립보란 곳에 이르러서 전도를 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고, 그 전도했을 때 점하는 귀신 들린 사람 하나를 만나 그 여자를 나수어 준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의 주인들이 그 점하는 귀신 들린 여자가 점 귀신에서 해방된 것을 보고 자기네의 이익과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큰 거리에 가서 관원들에게 끌어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송사를 한 것이고 그 송사를 듣고 상관들이 덮어놓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서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그래서 많이 맞았습니다. 참으로 고통스럽고 괴로웠을 것이올시다. 이렇게 많이 맞은 후에 옥에다 집어넣고 가뒀고 간수에게 분부해서 든든히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깊은 옥에 갖혔다는 것은 얼른 그가 탈옥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고 옥 가운데 깊이 혹은 저 안에 땅 속 깊이 들어갔든지 혹은 깊은 집을 지었든지 그 옥에 가두고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집안으로 들어가서 가두고 그 발은 또 족쇄에 든든히 채웠습니다. 족쇄를 했어요. 이렇게 매를 맞아서 몹시 부르터서 아주 아프고, 깊은 토굴 같은 옥 속에 갇혀 가지고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이런 때올시다. 물론 이것은 하나도 자기네의 무슨 잘못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성신의 충만한 능력으로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을 귀신에게서 해방을 주고 나숴 준 그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해(利害)가 상반되니까 그 여종의 주인들이 일어나서 이와 같은 자기네의 텃세를 하고 또 무리한 송사를 해서 그렇게 된 것이올시다.

그런데 밤중쯤 돼서 이 바울과 실라가 같이 하나님 앞에 기도를 올리고 그냥 기도만 하고 신음을 하고 앉아 있은 것이 아니라 신음 소리 대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찬미를, 자기네끼리의 얘기로만 하나님은 높으시고 거룩하시도다 하고 둘이 얘기를 한 것이 아니라, 그 옥에 갇혀 있는 다른 죄수들도 다 들을 수 있게 찬미를 하니까  죄수들이 듣더라  했습니다. 이렇게 죄수들이 듣을 만큼 찬송을 부르니까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무너지고 문이 곧 다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생기니까 간수가 자다 보니까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 가지고 자결하려고 하니까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아라. 우리가 다 여기 있다.  이에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해서 뛰어 들어가서 무서워 떨면서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저희들을 데리고 나갔습니다.  선생님들, 제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습니까?  하고 바울 앞에서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겠습니까 하는 이야기를 물었습니다. 분명히 바울과 실라가 구원을 전파하러 다니던 사람으로서 그것 때문에 이 옥에 갇힌 것을 간수도 아는 것이올시다. 그러니까 거기서 다시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건 간략하게 이 말을 한 것이올시다만, 이렇게 누가가 기록할 때 간략하게 기록했습니다만 그 내용을 설명했을 것이올시다. 왜냐하면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어떻게 자세히 설명해서 저들이 전하는 주 예수를 믿어야 할 것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밤중에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맞은 자리를 다 씻기고 자기 뿐 아니라 그 식구들이 다 세례를 받았고, 그래 가지고 그들을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 음식을 차려 주고  그들이 다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였다  했습니다. 그리고 물론 이튿날 날이 새니까 상관들이 아전을 보내어 이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해서 석방하게 되는 경위가 거기 나옵니다만.

우리가 여기서 특별히 배울 것은 사도 바울 선생이 가장 고생스러운 그 시간에 무엇을 했느냐 하면 기도와 찬송을 드린 것이올시다. 기도를 드리는 것은 사람이 고통할 때 많이 드립니다. 야고보서 5:13에도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보면,  기뻐하는 자들은 찬송할 것이니라 고 했는데, 여기는 맘 가운데 주님을 의지하는 거룩한 신앙이 가득한 그들로서 가장 몸이 고통스럽고 어려운 시간, 환경이 악한 때라도 주를 찬송한 이 사실이 특별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일입니다.

대체로 이 찬송이라고 할 때는 신생(新生)한 사람, 중생한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처음에 교회의 하는 것들을 배울 때 교회와 또 여러 사람 앞에서 자기도 따라서 하게 되는 중요한 교회의 의식의 하나로 생각합니다. 여럿이 같이 기도할 때 고개를 숙이고 고요히 엎드리기도하고 여럿이 같이 그 찬송의 말을 따라서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보통 경험으로는 처음으로 예수를 믿고 나오는 형제나 자매는 교회에 처음 나와서 여러분들이 함께 찬송가를 가지고 서서 혹은 앉아서 찬송 부르는 것을 옆에서 볼 때에 자기도 이것을 같이 부르고 싶은 심정이 생길 것이고 그것을 부를 때에는 그 말을 하나씩하나씩 새겨가면서 그 뜻이 참 마음 가운데 기쁨을 준다 하는 것을 많이 느꼈을 것이올시다.

그렇게 해서 찬송을 부르고 부르고 나가지만 부지불식간에 찬송의 말 뜻이  그 전에 불러서 참으로 기쁘구나  하는 그것이 차츰차츰 변해서  이제 이 말 뜻을 내가 한번 불러서 안다. 내가 두 번 불러서 다 안다  하는 생각이 들고, 그 다음에는 그것은 그렇거니 하고서 부르게 되고, 그 다음엔 차츰차츰 지날 것 같으면 그 찬송은 찬송이니까 부른다 하는 식으로, 그 처음 불렀을 때 찬송을 부르던 그 마음의 깊이와 즐거움과 마치 무슨 맛있는 것을 먹는 것과 같은 그런 마음을 감화시키는, 마음에 평안함과 만족을 주는 그런 정신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또한 경험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찬송이 무슨 음식같이 처음 먹었을 때는 맛이 있지만 자꾸자꾸 먹어가면 얼마 후에 배가 부르게 되면 맛이 없게 되는 그런 것과 같은 것이 아니올시다. 그런 것이 아니지만 사람은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기도 쉽고 그런 식으로 부르기도 쉽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그 찬송을 부를 때 마다 신선하게 성신님이 우리 안에서 크게 역사하셔서, 그런 걸 처음에는 재미있다가 점점점점 그 흥미가 줄어지는 식 사람의 심정과 사람의 맛보는 감각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고, 성신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신선하게 항상 새롭고 능력 있는 것을 우리에게 마치 생수와 또한 기묘한 여러 가지 맛으로써 공급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일이 우리 안에 늘 있게 마련인데도 다만 우리가,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과 영광을 찬송하는 것도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영광이 뜻하는 바를 신선하고 새롭게 느껴가면서 하지 못하면 이미 한번 알고 느낀 일을 다시 반복해서 그걸 뒤적거리고 뒤적거리고 하는 식으로 느껴가면서 찬송을 하면 그 느낌이라는 것이 대단히 희박해지고 나중에는 거의 무감각한 상태에 빠져들어가는 것이올시다. 사람의 종교적인 열정으로써 무엇을 하는 것은 그 맛이 항상 이렇게 체감(遞減)해 나가는 것이오. 이것이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올시다. 사람이 마치 인생의 감각을 가지고 맛 있는 음시글 먹더라도 점점 그 음식의 맛이 체감해 가는 것과 같이 사람은 정신적인 어떤 작용할 때에도 그것이 처음엔 맛이 있다가도 차츰차츰 체감해 가는 것을 많이 느낌니다. 찬송도 같은 말을 또 부르고 또 부른다고 해서 새로운 맛이 더 신선하게 증진될 까닭이 없어요. 그래서 자꾸 맛이 점점점점 감소되어 나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같은 찬송을 또 부르고 또 부르고 하는 것이 득책(得策)이 아닌 줄을 압니다만 그러나 찬송은 왜 이 말을 써서 이 찬송을 불러야 하는 이유가 거기 먼저 명백하게 늘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냥 적당하게 한번 해본다든지 음악에 흥미가 있으니까 부른다든지 마치 무슨 노래라도 한번 불러보고 해본니까 부른다든지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예술적 행동으로 할 때는 가미할런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찬송하는 진정한 찬송이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동기나 그러한 정신만 가지고는 도저히 부적당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어떤 노래를 부를 때 부적당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세상 사람이 보통 노래를 부를 때는 그런 정도로 부를 것이오. 그러나 찬송은 그렇게 불러요 그래서 찬송이 제대로 되게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찬송가에 있는 노래를 다 부르는 것은 그것대로 자기의 마음에 위로도 되고 자기의 예술적 감정을 채우는 일도 되고 그런 예술적인 요구에 대답하는 것이 되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마치 어떤 다른 예술 가곡이나 다른 것들을 하나 택해서 부르는 것과 비슷한 심정일 것이올시다만, 찬송을 하나님 앞에 드렸다 할 때는 항상 그 조건이 훨씬 다른 조건이 붙어 다니는 것이올시다. 그 다른 조건이 뭐냐 하면 찬송은 내가 부름으로써 족한게 아니고 하나님이 들으셔야만 하는 것이올시다. 하나님이 들으셔야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들으시도록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부르든지 마음을 다해서 정성을 들여서 찬송을 부르면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생각한다면 심히 부적당한 생각이올시다. 왜냐하면 사람이 정성도 갖가지고 사람이 마음을 다한다는 것도 정도가 굉장히 차이가 많고 그래서 사람 보기에도 어떤 사람의 정성이나 마음은 가득한 것 같고 어떤 사람의 것은 가기 딴엔 정성을 들였다 하나 오만무례한 것도 있고, 심히 부적당한 것도 있는 것을 판별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그가 가진 교양이나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교육이나 환경이나 이런 것들로 말미암아서 저는 잘못한 줄로 여기지 않지만 잘못하는 일들이 참 많은 거요. 하나님 앞에 찬송을 하더라도 자기는 정성을 다해서 하나도 잘못한 것이 없고 잘한 줄 알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이라고 하나님의 법칙에 벗어나는 일이 많이 있는 것을 우리가 일일이 다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법칙을 모르고 하나님의 도리를 모르고 제멋대로 할 것 같으면 자기는 정성을 다 했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심히 부적당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와같이 우리는 찬송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요소가 가장 중요한 요소올시다. 들으시도록 하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음악을 하고 아무리 자기 정열을 다 쏟고 아무리 정성을 거기 다 모았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 찬송이 되지 않습니다. 찬송은 하나님 앞에 상달이 되어야만 된다 하는 점을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마치 기도도 하나님 앞에 올라가서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가 아니라면 그것은 기도로서 의미가 없는 것이오. 하나님께서 가부간에 대답해 주시는 기도가 되어야 진정한 기도가 된다는 것같이 찬송도 하나님이 들어주셔야만 제대로 바른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찬송은 하나님의 법대로 하나님이 내신 그 법칙에 의해서 상달이 되는 것이지 그러지 않고서 사람이 자기 딴에 가장 좋다 하는 방식으로 하나님 앞에 아무리 애를 써서 무얼 올려놓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상달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상달되게 올리는 찬송이란 무엇이겠는가, 어떻게 하는 것이겠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잠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 앞에 상달되기 위한 찬송을 배우기 전에 먼저 하나님 말씀 가운데 옛날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신 제사의 법을 공부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할 것 같으면 찬송이 하나님 앞에 상달된다는 점으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점으로 이것은 뭣이냐 하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명하신 제사의 여러 법칙이 있는데 그 제사라는 것,  제사 드리는 것  이것이 곧 심히 중요한 것이라고 이미 말씀드렸는데, 그런 것이 찬송도 포함된 사실이올시다. 다른 말로 말하면, 찬송이란 것이 그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올시다. 제사의 한 가지란 말씀이오. 여러분이 아시는 히브리서 13:15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그랬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 를 드리자. 찬미의 제사라, 어디 누구한데 드리는 제사냐 하면 하나님께 드리자. 그 하나님께 드리는 이 찬미의 제사라는 것은 또 한편으로 볼 때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하나님의 성호를 혹은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하는 바 입술의 열매다. 마음의 열매가 아니고 손의 열매가 아니고 입술의 열매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찬송은 하나님 앞에 제사가 되게 기뻐이 받으시는 제사가 되는 것이올시다. 시편 69:30-31,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도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  그러한 구약의 제사를 볼 것 같으면, 그 제사의 큰 종류를 나누면, 죄에 관한, 직접 죄에 관한 제사 속죄제, 또한 거기에 따라서 속건제, 이러한 제사가 있어요. 그 다음에는 번제라 하는 제사가 있고, 소제라 하는 제사가 있고 화목제라 하는 제사가 있습니다. 속죄제에서는 죄를 속하는 제사라 하는 말이올시다. 속건죄 할 때는 그것도 죄에, 허물 건(愆) 자(字)인데 사람의 허물을 속하는 제사라, 그 다음에 번제라 할 때는 다 태워 올라간다는 뜻에서 태울 번(燔) 자를 써서 번제라 하는 말을 썼습니다. 번제의 가지고 있는 뜻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린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오. 속죄제라는 것이 자기의 죄 있는 것을 시인하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고하고 죄를 속함을 받는 정신을 표시하는 것이고, 속건죄란 것은 자기의 행동이나 말이나 직접 사회 생활을 하면서 남에게 누를 끼치고 하나님 앞에는 죄를 범했다는 것을 느끼고 하나님 앞에는 죄사함을 받아야 하고 속함을 받아야 하고, 사람에게는 배상을 해야 한다. 이것이 속건죄의 일이올시다만, 번제라 할 때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것임으로서 하나님께서 온전히 다 받으셨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이 다 쓰셔야 한다. 그런고로 내 자신의 존재란 하나님의 것이다 하는 것을 특별히 가르치는 것이올시다. 그러나 그 다음에 소제, 이 소제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요소(要素)라는 소(素)자를 쓰는데, 흴 소(素)자, 그런고로 그것은 자기 자신의 행동, 생활 행동을, 또 자기가 무엇을 해 나가는 것을 이것을 다 하나님 앞에 바쳐서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히 받으시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축복하셔서 땅 위에서의 생활을 보람있게 하시며 유의하게 하시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그냥 존재뿐 아니라 자기의 생활 활동을 전부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이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받들림을 받으셔야 하겠다는 그런 뜻이 나타나야 하겠다는 것이올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자신의 이야기뿐 아니라, 여기 제사라는 것 전부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하신 것과 우리를 위해서 속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을 전부 드려서 일하신 것과 당신의 생활 전체가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쁘게 받으시는 그 식물, 혹은 제사와 같이 늘 확실히 우리에게 보이신 것을 의미하는 것이올시다.

다음에 화목제란 것은 드리는 사람이 드리면 드리고 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린 사람에게도, 제사장에게도 또 하나님의 거룩하신 앞에서 먹으라 하시므로 그 드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그 응식(應食)을 자기도 잔치로 먹고 자기 식구와 함께 먹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충만히 받아서 하나님이 주신 양식으로 자기가 더욱 힘을 얻고 나간다 하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잔치를 내려주셔서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한다는 것을, 특별한 잔치로 즐김을 받는다는 것을 교통함으로 받는다는 것을 표시합니다.

이런 제사의 정신이란 것이 찬미 가운데 늘 들어 있어야만 찬미가 유효하다. 즉 찬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터 위에서, 그 속죄하신 큰터 위에서 반드시 하나님 앞에 상달돼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 올려야 할 것이고, 찬미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속죄 사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다 해서 주님께 전부 드린다는 정신 가운데 늘 불리워야 할 것이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전부를 하나님께서는 기뻐이 받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체를 주장하셔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하셔야 할 것을 분명히 마음 가운데 인식하고 간절히 소원하는 사람이 이 찬미의 제사를 드리게 되는 것이오. 또 우리의 생활 전체를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전부를 하나님 앞에 드려서 생활하는, 그런고로 내것이다 주장할 것 없고 내 행복을 추구한다고 주장할 것 없이 다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나가야겠다는 그 뜻대로 나가겠다는 그리고 그렇게 매일매일 생활하고 나간다는 것을 고백하는 의미로서 찬미가 상달되어야 할 것이고, 찬미를 주님 앞에 부르면 주께서는 들으시고 기쁘게 받으신 거룩한 표로 나의 마음 가운데에도 더 기쁨을 내려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또 주님을 사랑하는 더욱 간절한 신앙을 주시고 주님을 더욱 감사하는 심정을 주시고 또 주를 찬송한 사람다웁게 형제에게 대해서도 항상 마음이 아름다웁고 다숩고 평안함을 늘 남에게 끼친다는 이런 거룩한 상태에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없이 찬미는 입으로만 부르고 정신은 딴 데 가 있고 하면 결코 하나님 앞에 바른 찬송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여러분 우리들은 늘 하나님 앞에 바르게 찬미의 제사를 드리고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것은 그 이름 하나님의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 직접 입으로 부르고 말로 나타내 가지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호가 다른 사람에게 들리고, 하나님의 성호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도  그가 하나님을 저렇게 높이는구나  하는 것을 알려 줘야 하는 것이 우리의 찬미의 주요한 실제 효용이올시다.

우리가 찬미를 할 때에는 그러므로 성신을 늘 의지하는 데서만 이런 바른 찬송을 할 수 있는 것이고 자기 자신의 그때 예술적 일시적 기분이나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정신으로 하면 잘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찬송을 드려야겠다 할 때는 성신을 의지하고 성신께서 나를 주장하시기를 간절히 먼저 바라고 그리고 신중하게 마음을 기울여서 성신의 은혜로 이 찬송이 주님 앞에 상달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찬송을 올려야 할 것입니다. 나 혼자 아무리 정성을 드려도 내 정성으로 하나님 앞에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의 터 위에서만 주께서 불쌍히 보시고 받아 주실 것을 믿고 찬송을 하는 것이오. 그러면 찬송에 대해서 우리가 오해 없이 큰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기  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저희들이 주님 앞에 드리는 찬송은 성신님을 의지해서, 저희 스스로 드리는 것이 아니옵고, 성신님을 의지해서 성신께서 인도하심으로 아버님 앞에 상달하는 것임을 믿고 진정으로 주께서 들으시는 찬송을 드리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 자기의 종교적 열정이나 예술적 감흥으로 노래를 부르거나 종교 가곡을 하거나 하는 것이 찬송이 되지 않음을 깨닫게 하시고, 아무 의식 없이 차례 지내듯이 하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죄송스러운 것인가를 깨닫게 하시고 진정으로 신으로 주께 찬송을 올리고 찬송을 드린 심정으로 주님의 거룩하신 보좌 앞에 엎드려 또한 절할 수 있게 늘 저희를 이끄시고 저희를 깨우쳐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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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김홍전 목사  |  찬송에 대하여(II)  |  성약교회 1974. 5. 14.  |  성은교회 1994. 7. 20.
 
우리 교회 찬송이라 하는 것, 또 우리 교회가 가지고 있는 성격과 우리들이 각각 교회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런 구체적인 현실적인 문제를 우리가 바로 볼 수 있어야    우리 교회 찬송이라고 하는 것은 찬송 하나만을 단편적으로 부를 때 뭐 다른 지금까지 내려오는 여러 가지 찬송과 비교해서 다를 것이 없다고 느낄 수가 있어요. 특별히 음악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 음악을 다소 안다고 할지라도 - 그것이 가지고 있는 의도를 그리 잘 알기는 어려울 거예요. 찬송이 충분히 자체의 특이성을 늘 바로 증명하는지, 그렇지 않는지 우리가 잘 모르겠고, 찬송은 그 특이성을 잘 만들어야겠지만, 과연 그렇게 찬송을 들으면서  아! 이 찬송은 세상 다른 보통 찬송과는 다르구나  하는 것을 잘 민감하게 못 느낄지라도, 그러나 계속적으로 우리 교회 찬송을 여러 개를 부르고 그 찬송을 어떻게 부르는 것이 옳은가, 부르는 그 순서나 그 부르는 차서(次序) 그것을 따라서 부를 것 같으면 그 찬송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위치를 모두 다 알 거예요.

가령 영광송 1번 같은 것을 부르면  그 참 찬송이 어떻게 그리 짤막하냐?  보통 교회에서 일반적인 찬송에 익은 사람으로는 그게 짤막해서 송영인가 보다 하는 정도로 생각할 거예요. 송영이죠. 송영은   영광송이니까,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니까. 그 다음에 생투스(Sanctus), 말하자면 생투스라고 성삼위 찬송을 들어 볼 것 같으면 그 계속해서 석절, 넉절 불렀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그렇게 길지를 않다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리고 그 다음에 경배송을 들어 볼 때에는 또 이건 뭐 다른 찬송책에 있는 다른 지금까지 불러온 여러 찬송하고 뭐 그렇게 특별히 다를 것 없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기가 쉬워요.

그렇게 되어 있는데, 실질상 영광송을 불러야 할 시간에 영광송을 부르고 성삼위를 꼭 차서에 맞추어서 정식 예배하는 시간에 예배하는 심정에, 논리적인 순서적인 전진과 맞추어서 찬송을 불러 간다는 데에 맞추어 놓고서 우리가 해보면, 무슨 예배를 본다고 우리들이 모아 가지고 기도를 한 다음에 기도하고 난 다음에 우리 무슨 찬송 하나 불렀으면 좋겠는데 무얼 부를까 하고 얼른 생각해도 다른데서 얼른 생각이 안 나는 거죠, 그렇죠? 다른 찬송책에서. 기도하고 난 다음에 무슨 찬송을 이 기도에 맞추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나의 간절한 소원도 있겠지마는, 그러나 예배를 드리려고 처음에 묵상하고, 기도하고 난 다음에는 그 예배 드리려고 묵상하고 기도하는 기도는 내 모든 기도와 특별히 다를 것이 없는 기도는 아니지요? 그러나 그것 특별히 다른 기도예요. 그럼 특별히 다른 기도는 뭐냐 하면 우리 교회에서는 예배를 시작할 때 하는 기도가 주기도문을 가지고 기도를 하게 되지요. 그 주기도문은 모든 기도와 비교해서 아무것도 다를 것이 없는 기도냐 하면 그것 아니에요. 주기도문이야말로 다른 모든 기도보다도, 그런 기도의 전형이 될 만큼 가장 잘 거기 요약되어서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오.

우리 아침에 처음에 예배를 드리려고 할 때에 주악을 할 때에 그 주악도 그냥 여기서저기서 마음대로 주워다 모아 가지고 하지를 않고 그 목적을 위해서 쓴 곡조를 죽 연주를 해서 그 주악을 듣고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딴 생각을 하게 안하고 주악을 듣고 마음이 세상으로 달려가서 세상의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심정으로 끌고 가려고 하지 않고 주악이  오직 하나님을 찬송하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엎드리자  하는 데로 마음을 모으도록 최소한도로 그런 성격을 가지려고 주악을 만든 것이고, 그 주악을 듣고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여러분들 다 그렇게 지내보신 대로 우리 교회에서 하는 이 독특하게 쓴 프렐루드(prelude)들을 들을 때 그 프렐루드를 듣고 세상의 다른 연주회에서 듣는 심정이나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서 인간의 향락과 즐거움을 위해서 듣는, 곡조를 듣는 것과 같은 그런 기분이 아니고 훨씬 더 경건하고, 아 하나님 앞에 경배를 하겠다는 데로 마음을 모으는 데 도움이 되죠. 주악을 들을 때.

그렇게 주악을 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는 시편을 죽 읽을 때는 그 시편이 가지고 있는 그 여러 가지의, 몇 가지의 중요한 성격들 가운데 꼭 예배드리기에, 예배 시간에 맨처음에 하나님 앞에 마음으로 소원을 하고 또 마음을 경건히 가지고 하나님 앞에 부복하려는 사람에게 필요한 시들을 뽑아서 읽는 것이에요. 그건 어디가 누가 이렇다 하고서 써 놓은 것은 아니고 우리가 여러 해 하면서 맨 처음에는 저 혼자 시편 150편을 다 읽어 보면서 한 표준을 딱 세우고 그 표준하에서 이 시는 어떠한 시인가 하는 것을 다 따져 가지고 만들어 놓은 것이에요. 그래서 아시겠지마는 어느 때는, 늘 그런 것은 아니나, 차례차례 읽지 않고 읽다가 중간에 딱 떼고 저기 가서 읽어서 연합하는 수도 있고 그래요. 왜냐하면 그 중간에 있는 잡다한, 예배하는 데로 이끌기 위한 마음의 단순화, 순수화를 유지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다른 것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호소하게 하는 그런 말들이 있을 때는 그건 정비를 한다 말이에요. 그리고 넘어서 처음에 하나님을 찬송하고 묵상하는 것과 그게  그러나 다 많은 이야기를 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을 찬송할 뿐이오. 하나님을 높이 숭앙할 뿐이다  라는 그 결론을 붙이는 그런 장면을 딱딱 따서 모두 불러요. 읽음으로써 마음이 그 시간에 다른 데로 가지 않고 하나님 앞에 다 모여 들어가기를 바라는 거요. 거기 개인의 묵상을 기도할 수 있는 것이지만, 기도를 아주 특수한 경우 외에는 될 수 있는 대로 하지 않고 이미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영감되게 씌어 있는 기도문들을 쓰는 것이오. 그러나 기도라 할 때는 그 기도의 내용 가운데 여러 가지가 있지마는, 기도의 내용 가운데 여러 가지가 있죠? 기도의 내용 가운데는 찬양을 하는 것이 있고, 감사하는 것이 있고, 또 사죄를 구하는 기도가 있고, 그 다음에는 자기 자신의 소원을 고하는 것이 있고 - 늘 일상 문제, 현실상의 문제 - 다음은 남을 위해서 도고하는 데가 있고, 그 다음은 다시 하나님을 송축하는, 송축의, 송영하는 부분이 있고, 그리고 끝내요. 대개 기도에는 그런 요소들이 모두 있지요. 꼭 그것이 전부 구비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것은 아니나 대체로는 기도할 때에 그것들이 끼이죠. 그러는 건데, 시편에 있는 그것들을 뽑아낼 때 시편이 가지고 있는 그 몇 가지의 중요한 특성이랄 것이 있는데, 그중에 찬송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더 찬송하기를 원하는 심정과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기원을 담을 것을 주로 해서 뽑아내는 거예요, 시편을.

그 시편에는 첫째, 시편은 무엇이냐 하며는 찬송이에요, 찬송. 그래 찬송하는 부분이 많이 있어요, 찬양하는 것. 둘째로 시편은 절절한, 절실한 기도가 많이 섞여 있어요. 그래서 자신 마음 가운데 간절하고 괴로운 심정을 호소하는 장면이 또 많이 있어요. 시편은 또 그와 동시에 거룩한 교리의, 좋은 도리를 가르치는 부분이 있어요. 이것은 특별히 나의 찬송인 것보다도, 나의 기도인 것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오묘한, 신비한 도리를 가르쳐 나가는, 큰 도리를 진개해 나가는 것을 떡 열어 놓고서 보여주시려는 그런 장면들이 많이 있어요. 그렇게 세 가지만 있는 게 아니라 시편에는 또한 감사하는 부분들이 있어요, 하나님 앞에.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찬송하고 또 자기 실정을 호소하고 또 거룩한 교리를 가르치는 게고, 시편의 그런 것들, 그러면서 아주 드물게 역사를 잠깐 보이는 부분도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러나 역사를 사실로, 사실의 기록으로 보여주는 것보다는 그것의 의미와 그와 그 개인의 관계된 부분을, 즉 개인의 신앙에 관계된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이오. 그리고서는 그 시편에는 강렬하게 죄의 고백이라는 부분이 있어요. 아주 두드러진 시가 있죠. 특별히 죄를 지은 사람이 죄를 고백할 때 쓰는 시가 있죠. 그리고 그 죄의 고백은 그냥 고백만 있는 게 아니고 거기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이 있어요. 그런 경우에 하나님은 어떻게 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다, 이렇게. 그러니까 이러한 한 다섯 가지 중요한 요소, 그런 것에 의해서 시편들이 씌어져서 어떤 한 편에는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주로 무엇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 있어요. 그런 것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찬송을 하는 것, 간절히 자기의 실정을 호소하고 구하는 것, 그 다음에 감사하는 것,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도리는 무엇이다, 개인에 관계되든지 교회에 관계되든지 어떤 것이다 하는 것을 특별히 계시해서 보여 주는 것, 그리고 죄에 대한 호소와 고백과 회개, 토로 그런 것, 시편에 이런 것들이 있는데, 아침에 맨 처음 예배를 드리려고 할 때에 읽는 시에는 죄의 호소가 전연 결핍됐다든지, 있어서는 안 되겠다든지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게 주조(主調) 되는 것은 아닌 거요. 제일 주조 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찬송하며 예배 드리는 심정을 표시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 다음에는 찬송과 예배에 섞여서 혹은 간단하게 죄의 고백이 붙어 다닐 수가 있어요. 어려운 하나님 나라의 큰 도리를 계시하는 깊은 교시를 쭉 서술한 것은 많이 읽지 않아요. 그건 어쩌다가 한번씩 나타나고 지나가고 그래요. 그렇게 해서 맨 처음에 아침에 예배를 하려고 하며는 그렇게 시를 낭송하고.

그 다음에 주님의 가르친 기도문을 가지고 기도를 죽 하고 난 다음에  아, 하나님의 영광을,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아멘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옵소서.  이런 영광을 찬송하려고 할 때 과거에 가지고 있는 찬송에서 적당히 뽑아낼 찬송이 많이 있느냐 하면 없는 걸 알아요. 그래 불가부득이 영광송이라는 것을 따로 여기 만들어 써 나가야 그런 경우에 쓰겠다. 이렇게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찬송 쓰는 것같이 찬송을 가장 고귀하게 쓸 수가 없는 것 아니오? 왜냐하면 예배라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심정에서 그렇게 묵상하고 찬송하는 심정에서 영혼이 그 앞에 절을 하려면 찬송하는 심정을 일으키는 건데, 그건 내 자신이 받은 은혜의 찬송보다는 하나님 당신의 덕과 속성을 찬송하는 것이오. 그러니깐 그의 영광, 영광 찬송을 거기다 넣은 거요. 그래서 말도 간단하게  하늘의 하나님께 찬송을 합니다  한다든지 그런 식으로 말을 썼어요. 거기에 어디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나타내는 심정에 관한 이야기가 없어요. 하나님께 직접 호소하게 만든 것이라 말이오. 찬송을 이렇게 쓴 찬송이라는 게 그렇게 많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가사의 의미에 있어서도 예배 드릴 때에 필요한 대로 썼다 하는 것이 있구요. 거기에 따라서 곡조도 그 목적을 위해서 곡조를 만들어 놓은 것이고, 그래 그 제자리를 찾는 거요, 찬송도.

그런 다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면서 하나님의 속성의 가장 종합적이고 중요한 것을 찬송해요. 그게 뭐냐 하며는 거룩하시다는 이야기요. 이방의 모든 신에 대해서, 저들이 신을 위대하다 그러고 힘이 있다고 그러고 혹은 무엇을 만든다 그러고 벌과 복과, 그런 것을 준다 하고 다 이렇게 하지만 그 신은 거룩한 신이다. 이렇게 그런 아이디어(idea)를 강렬하게 나타내는 것은 별로 없어요. 오직 참 하나님께 대해서 거룩이라는 사실을 아주 두드러지게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오. 거룩하다는 것은 이 세상과 모든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분이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고 홀로 한분이시고 영광에 둘러싸여 있는 그 분은 그러므로 거룩하다. 이렇게 종합적으로 이야기하는 거요, 여기서. 거룩한 하나님, 그 하나님은 성삼위이다. 삼위요. 그래서는 성삼위요. 거룩하시며 삼위 되시는 하나님이다. 이건 교리로서도 가장 중요한 교리 하나로 선언하는 것이오. 우리가 지금 찬송하고 우리가 기리고 모시며 높이며 우리가 이제 그 앞에 엎드려 절하려고 하는 그 분은 부 자 신(父子神), 아버지와 아들과 성신, 즉 세 위, 세 품위, 세 인격을 가지고 표시하시는 그런 하나님, 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니까 한 하나님 한 위가 아니다. 1위(位) 1신(神)이 아니다 그거요. 그리고 한 하나님이 있고 그 아래 다른 것이 부속되어 가지고 같이 있는 그런 분이 아니다. 제일의 신이고, 그 다음에 데미우로고스고 아이오운이고 그런 어쭙지 않은 신이 아니다. 오직 거룩하신 모든 권리와 영광에 있어서 동등이신 성삼위이다. 그래서 그 성삼위를 찬송함으로 필연적으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만을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아드님으로 계시고 또 일찍이 육신을 입고 땅에 오셨다가 영광의 육신으로 그대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찬송도 되고, 그리고 그들로부터 나오는 바 거룩한 성신, 우리에게 모든 은혜를 주신 우리 안에 계시고 그리고 교회 안에 계시고, 그리고 하나님으로서의 무소부재의 속성을 가지신 거룩한 성신에 대한 찬송도 되는 것이다 말이오. 이래서 성삼위를 찬양하는 거요.
찬양하면서 마음으로 과연 찬송할 분이요, 그렇게 절할 뿐이다 할 때 그걸 찬송할 수 있는 찬송이라는 게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꼭 성삼위를 찬송하고 싶다 하는 생각이 날 때 여러분이 과거의 찬송 가운데는 무엇을 끄집어 내셨어요?  하나를 잘 알아요.  성재, 성재, 성재  그 나머지는 뭣 또 있어요? 어떤 것이 또 성삼위에 대한 그렇게 아주 명확한 찬송을 올리려고 하는 것이 있어요? 그런데 얼른 생각이 안나지요. 그런데 주일마다 성삼위 즉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성삼위를 생각한다고, 정당한 신관, 신개념을 그때 다시 마음 가운데 일으켜 가지고 그에게 대해서 경배를 할려니까 성삼위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해요. 그래서 생투스(Sanctus), 차라리 이런 점에 있어서는, 그런 음악에 있어서는 카톨릭은 생투스를 미사곡 가운데 아주 중요한 부분으로 늘 만들어 내놓아요. 그런데 그거 없잖아요. 그러니까 좀더 경건히 그 예배를 합리적으로 이지적으로 바르게 차서를 따라 하려고 할 때 이것은 필요하다 그렇게 한 거요.

이건 물론 성약교회를 세운 다음에 비로소 생각한 것은 아니고 제가 옛날부터 무슨 음악을 써야 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음악을 써야 한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음악을 쓰며는 어떻게 뭣을 써야겠는가 할 때 처음에 서곡을 하고 서곡에서 하나님 앞으로 마음을 이끌고 그 다음에는 영광을 찬송하는 하나님의 글로리아(Gloria)를 부르고 그 다음에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노래해야겠다. 그래서 제 옛날에 썼던, 성약교회를 아직 꿈도 꾸기 전에 썼던 예배학의 순서요, 벌써 그게. 예배 음악은 이렇게 써야겠다고. 그런데 이제 실지로 교회에서는 그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다. 그때 내가 썼던 예배학의 성삼위 혹은 예배학의 글로리아(Gloria)는 어떤 것은 길고 복잡하고, 대위법적이어서 상당한 기능 있는, 지식 있는 사람들이 불러 주었으니까, 교회에서 부르기 위해서는 그렇게 찬송을 비교적 화성을 가지고 누구든지 얼마 동안만 훈련하면 곧 부를 수 있는 곡을 만들려고 그래 만든 거에요.

그 다음에는 기도를 올리고 나서 저희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합니다 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예배하는 심정을 호소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어서 그래 그 찬양하는 그 부분에 예배라는 이름을 붙여서 경배송을 만든 것이고, 그걸 그 순서를 따라 가지고 그렇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런 순서에, 찬송의 인도를 받아 가면서 예배하는 데 들어가면 정신만 거기에 기울인다면 훨씬 그것이 이지적이고 영혼의 그 요구에 잘 적합된 것이 될 것이다 하는 거요. 그러니까 하나를 놓고, 단편적으로 놓고 볼 때에는 그게 뭐 다를 게 있느냐 할 것 같지마는 그것을 제자리에다 놓고 죽 불러가면서 그것이 요구하는 바 그 예배의 정신 가운데 들어가기만 한다며는 그것 참 좋지 않느냐?

이것이 찬송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의미들, 거기에 그런 순서 다 맞도록 대조해 가면서 쓴 까닭에 종래에 부르던 다른 찬송을 거기에다 끼워 넣으려면 종래의 다른 찬송의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에, 가사의 의미와 가지고 있는 성격 때문에 특별히 주의해서 끼워 넣어야 해요. 그런 것을 우리가 전혀 않는 것은 아니지요. 전혀 않는 것은 아니오. 어쩌다가 우리 찬송 뒤에 있는 몇 개의 다른 찬송들이 있지만, 그것들을 끼워 넣지만, 그것도 그 곡 자체가 가지고 있는 성격이 예배하는 것보다는 자기의 감상적인 것을 더 표현하게 되어 있다 하는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넣기가 어려워요, 예배 음악에. 우리 교회가 잘 부르는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함은  하는 그런 찬송요. 그런데 6/8이든 6/4으로 되어 있는 그것은 곡조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감상적인 요소 때문에 우리 예배학의 자리에 그것을 대치해 놓으며는 별로 좋지가 않다는 생각이 있어요. 여러분 생각은 어때요? 때때로 그것을 대치해 볼까요? 우리의 예배학을 하는 대신, 경배송을 하는 대신  내 주 앞에 나가기     하는 그 찬송,  내 주를 가까이     하든지 뭐라고 하든지,  내 하나님께로  그렇게 나가든가요. 좌우간 그것을 끌어다가 찬송에 넣는데 그것을 거기다가 대치하면 예배학으로서는 그게 더 우수하지 않다는 생각이, 말 자체가  하나님께 더 가까이 십자가 짐같은 고생이지마는 더 찬송할 내용을, 찬송을 부르면서 가까이 갑니다.  그건 우리 신앙의 전 코스(course)에 있어서 자기 혼자의 감상을 노래할 때는 좋으나 예배하는 그 당장에 있어서는 그 현실에 있어서는  하나님 내가 당신의 영광을 찬송하고 오히려 아버지가 가지신 덕과 영광을 크게 바라면서 절합니다  그 이야기는 아니오. 그러니까 안 맞는다 그거요.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런 찬송들을, 찬송책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그 찬송도 가끔 거기다가 집어 넣어 가지고 해보니까 그렇게 해서 하는 것과 우리가 부르는 이 찬송으로 우리 자신들의 영혼의 태도와 고백과 의식을 명백히 하고 늘 들어가는 것과는 많은 차이가 벌써 나지 않아요? 찬송 자체에서. 그런 점에 큰 의미가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죽 그걸 제자리에다가 놓고 한 번 불러 보세요. 우리가 순서를 짠 대로 늘, 그럴 때 거기서 훨씬 그 찬송이 우리를 끌고 가는 맛도 다르다 그거요. 훨씬 이지적으로, 그리고 분명히 경배하는 의식 쪽으로 자꾸 끌고 들어가려고 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런 것이 거기에 있고, 그 다음에는 헌상하는 것도 분명히 헌상의 의미를 가진 찬송을 불러요. 보통 다른 데서는 헌상할 때 콰이어 멤버(choir member)라고 찬양대가 무슨 가사도 잘 모를 찬송을 해요. 찬양대가 찬송을 하는 것을, 연보할 때 만일 찬송하려면 그 가사를 잘 한마디 한번 들어 가지고 아는 사람이 별 많지 않을 거요. 뭘 했는지 모르나 찬송을 하나 했다는 그것이오, 주로. 그러니까 이지적으로는 내게 호소하는 것이 없어요, 합리적으로는. 단순히 내 감정에, 감성에 어느 정도 만큼 부딪쳐 오는 것뿐이오. 그러기에 말을 전혀 다른 말로 했다더래도 내가 헌금하면서 듣는 찬송에서는 그 말이 뒤집혀 놓는다고 해도 그리 큰 차이는 없을 것이에요. 그것 우리 말로 않고 영어로 한다고 하더라도 가사 자체에 있어서 내게는 굉장한 차이를 일으키지 않아요. 못 알아 듣는 말을 할지라도. 그만큼 의미가 그 가사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지성이라는 것이 약한데, 우리의 헌상송은 그 부른 것을 또 부르고 또 부르고 해서 거의 다 그 말들을 알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 자신이 부를 때 그냥 왕왕 부르지를 않고 그 말 자체의 의미를 저작해 가면서 자꾸 부르도록 되어 있어요.  주님 나의 주님 내 생명이 되시며 내 모든 것 주께로부터 다 왔습니다  하고서 분명히 헌상하는 의식을 표시하는 것이지, 그때는 성삼위를 찬송합니다 그런 의미도 아니고 영광에 대한 찬양도 아니고 이제는 헌상합니다 하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거든요. 찬송과 그 예배 과정에 있어서의 자기의 마음의 태도를 늘 병행시켜 가면서 시키려고 하는 것이거든요, 그게.

그리고 그냥 아무것도 않고 헌상을 하는 것보다 찬송을 부르는 것이 좋은 것은 아무것도 안하면 무미건조해서, 밋밋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보통 사람이 헌금을 할 때에는 헌금 바구니가 자기한테 돌아올 동안에는 저것이 돌아온다는 것을 긴장하고 기다리고 온 다음에는 딱 풀고 앉았는 거요. 그게 이제 익어 놓으면 별 긴장이 없어요. 그런 사이에는 별 생각도 다 할 수 있는 거요, 사람의 마음이. 그리고 고요히 마음 가운데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전부 드립니다는 마음의 기원을 계속적으로 불러내 가는 일이 그리 별로 많지 않은 거요. 그 교회에서 찬양대들이 찬양하는 소리만 들으면서 하는 사람도 헌금하고 나서 그 찬양하는 소리를 듣지만 마음이 별로 자세히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뭔지도 모르겠고, 사실 실지로 찬양대들이 왕왕 해놓으면 무엇이지 잘 모르는 거에요. 합창에서는 가사가 그리 큰 의미를 안 가지니까. 차라리 단조롭게 할렐루야만 가지고 자꾸 부른다는 것이, 오히려 어피얼(appeal)하는 것이 나아요. 원래 음악에 있어서 합창의 의미를 이야기 할 때는 합창에 있어서는 그 독창에 있어서 시가 차지하는 식으로 차지하지 않아요, 그 가사는. 다만 그 음이 연합해서  아  나온다,  오  나온다,  음  나온다,  이  나온다 그게 음의 효과를 더 노리는 거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하는 것보다는 헌금을 하면서 계속적으로 자기 마음에 부르짖는 것, 그러니까 그 마음으로, 충심으로 찬송을 하라는 건 그 사람의 책임이니까 어찌할 수 없지만, 적어도 기회가 있어요. 중심으로 그 찬송을 드리기에. 그 찬송에는 누구든지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이 몸 이 마음 다 주께 드립니다 하는 그 심정을 표시하려고 하는 사람은 하게 되어 있어요. 그것을 가지고   그러니까 그것이 좋지 않으냐? 그래서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것도 의미를 가지는 것라고   

그래서 나중에 예배 끝나면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  성부 성자 성신께 영광 영광을 찬송합니다 아멘  그리고 끝나고, 끝내는 것이에요.
이런 찬송을 우리가 부르면서, 우리의 교회에 있어서 신앙 생활을 해나간다고 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우리에게 어떤 일정한 성격과 독특성을 부지불식 간에 세월이 가는데 따라서 만들어 주는 것이오. 찬송을 한번이라도 부르면 재미있다 혹은 참 의미가 있다 하는 정도에서 끝나지를 않구요. 그걸 1년을 부르고 3년을 부르고 5년을 부르고 10년을 부르면 그러는 동안에 우리의 성격은 그 신앙의 자태,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태도, 믿음의 모양이든지, 믿음의 자태든지 내 심정에 움직이는 그 방향이나 방법이든지가 부지불식간에 훈련되어 있어요. 부지불식간에 훈련이 되어 있어서 그렇게 해서 그 찬송을 하고 지나가던 그 심정이 그렇지 않은 사회에 들어가서 예배를 드린다고 찬송을 잡다하게 하고서 지내가면 조금 이질적인 감을 느낄거요. 이상하다! 그리고 또 그 전과 같이 훨씬 합리적으로, 구체적으로 나를 밀고 나가는 그런 것 대신 그냥 어떤 일반적인 소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나오는 것이오.

왜냐하면 그 찬송이,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찬송이 근래에 와서, 근대에 와서 한국 교회에서는, 예를 들면, 많이 혼탁해 진 현실을 빚어 가지고 있어요. 옛날 장로교가 단순할 때는 주로 미국에서 온 장로교의 선교사들이 미국에 있는 찬송들을 번역해다가서는 만들어 넣었는데, 그 후에 성결교도  부흥성가  라 해서 묘하게 그 부흥회하는 데서 왁자왁자하는 그런 찬송, 그렇지 않으면 행직곡 같은 벅덕벅덕해 가는 것, 이런 것들을 많이 끌고 들어와서 찬양대라는 것이 생기니까 이미 다 알고 있는 찬송을 부르기가 무엇이 쑥스러웠든지간에 부르지를 않고 알지 못하는 찬송을 해야만 무슨 멋이라고    부흥성가 에서 끌고 나와서 막 불렀어요, 장로교에서. 그러면 그것을 듣고듣고 듣는 가운데 아! 우리도 같이 부르자 하고서는 나중에는 손뼉을 쳐 가면서 부르는 데까지 다 이르는 것이오. 그리고 리듬도 마음대로 고치고 속도도 막 고쳐 가지고 복짝복짝 해가면서 심지어 나중에는 북도 두드리게끔 다 되었어요. 이렇게 해가지고서는 종교적인 대성회, 굉장한 대회를 열어 가지고, 대회가 옥신옥신해서 떠들고 좋다 하는 식으로 노래를 만들어 내지, 노래 그 자체로 지금같이 붕 떠서 공중에 떠 있는 심정이 착 가라앉고 착실하게 겸손하게 딱 부복하고 하나님 앞에 고요히 묵상을 하고 그 영광을 앙모하는 그런 심정으로 끌고 가지를 않게 되어 있어요. 그런 심정을 가졌던 사람도 그 속에 들어가서 부흥회하는 데 가서 떠들고 찬송들 해대는 소리를 들으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보다 무슨 기세를 굉장히 올리는 그런 정신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거요. 알미니안적인 생각에서 끌고 나가는 이런, 정신을 무엇으로 통일해야 겠다. 더군다나 그것이 방언파라든지 그런 경건주의, 감정주의 운동파의 찬송이라고 할 때는 그 감정, 센티멘탈리즘에 막 호소해 나가는 그런 것들이 많이 끼었어요. 그걸 나중에 찬송가를 크게 만든답시고 다 그것을 섞어 가지고 만들었어요. 그래서  신편 찬송 인가, 그 다음에는 뭐  합동 찬송 인가, 합동해서 만들어 내놓았으니까 각각 자기네 신학상, 신앙상 주장을 다 뒤섞은 것을 함께 놓고 불렀거든요. 곡은 꼭꼭 집어내가면서 이것은 아니고 이것은 그것이다고 한 사람은 드물어요. 목사로서 그런 사람은 참 드물어요. 목사가 다 주장하는 거요, 모두. 그런데도 아무 소양도 없는 이가 좌우간 말만 비슷하면 근사하면 그때에 후다따딱 그말을 갖다가 들어 붙이는 그런 재주만 있어도 대단한 재주로 알고 앉았는데요, 그렇찮아요? 교회에 부흥사가 와 가지고 부흥회를 하는데, 무엇 하나를 강조하면, 효도를 강조했으면, 야 효도에 대한 찬송을 후딱 어디서 뽑아다가, 야 한장 찾아 부릅시다. 효도를 강조했으니까 우리도 이제 한번 떠들어보자는 거요. 또 그렇지 안할 것 같으면 성경에 대한 강설을 했다 할 것 같으면 의미도 모르면서 그냥 성경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귀하고 귀하신 말씀일세  갖다가 부르든지 그렇지 않으면  어머니가 주신 성경 인가 그런 것을 갖다가 왁자왁자 불러대요. 그 자체가 왜 찬송을 하는가? 하나님께 찬송을 하려는 것보다 자기네가 들은 바를 어떤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곡조에다 기탁을 해가지고 그걸로 토로해 보자. 이것이 아니냐 그것요. 그것이 찬송이 되느냐? 자기의 종교적 감정의 토로가 되느냐?

그러니까 찬송이라는 것은 가장 숭고한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 직접 올라가고 하나님께 직접 아뢰는 것이 되고 찬송이 신령한 노래라 해서 자기의 신앙을 토로하는 면이 없는 것이 아니나 예배할 때는 하지 않는 것이오. 예배 이외에 기도회를 한다든지, 같이 모아서 무슨 음악을 한다든지 할 때는 그런 찬송 부를 수 있어요. 하지만 예배할 때는 제일 주요한 대상은 하나님이지 우리들의 기분이 아닌 것이오. 그러니까 자기가 슬프든지 기쁘든지 하는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셔야겠고 높임을 받으셔야겠고 기림과 찬양을 받으셔야겠다. 하나님의 그걸 나는 보아야겠다. 하나님의 속성을 나는 이제 묵상하고, 내 마음이 그걸 깨달아야겠다. 그래서 아! 그런 하나님, 이렇게 선하신 하나님, 이렇게 의로우신 하나님, 이렇게 사랑이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나는 이렇게 노래를 불러야겠다고, 이렇게 되어야 한다 그것이오. 즉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 중심으로 자꾸 변해야지, 자기의 종교의 경험이나 감정이나 자기의 종교의 흥분을 중심으로 자꾸 무엇을 끌어내려는 것은 이게 향상이 아니라 타락인 것이오. 그런데 찬송가에 그런 것이 많이 있다 그거요.

그런 까닭에 그러한 정도의 곡들이 있는데, 우리는 그 곡에 있어서도 경배의 찬송에 있어서나 성삼위나 모두 우리 교회에서 부를 때 쎈티멘탈리즘(sentimentalism, 감상주의)에 호소하지 않게 했다 말이오. 마음 가운데 조금 애수가 있는 심정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감상주의에 빠져 가지고 자기를 토로하지 않게 했어요. 오직 주님을 사모해 가면서 마음이 슬퍼도 주를 향해서 슬픈 심정을 토로하게 했어요. 그러니까 이 찬송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는 항상 주님이 거기 계시고 주님이 들으시고 주님 앞에 내 사정을, 내 거룩한 심정을 이렇게 호소합니다 하는 데에다가 항상 집중을 하지, 자기 자신의 죵교적인 흥분이나 감흥을 묘하게 센티멘탈한 가곡에 기탁을 해서 나타내겠다는 그것이 아니오.

이렇게 우리가 찬송을 해나가면서 살면 우리의 가지고 있는 입맛이 자연히 건실하게 되고 건강한 위치에서 우리의 신앙 생활을 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오. 그리고 우리의 정신도, 정서도 항상 하나님 앞에서 건전하게, 건강하게 도야(陶冶)되지, 센티멘탈하게 도야 안 되는 거요. 사람의 정신이 센티멘탈하게 도야되면 무엇만 보아도 눈물이 죽 흐르고, 무엇만 보아도 마음이 상하고, 무엇만 보아도 항상 눈에 어려 가지고서는 슬프고, 이렇게 되면 정상이 아니다 그거요. 하나님 앞에는 항상 울고 항상 슬퍼하고 항상 센티멘탈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항상 건강하고 건실해서 울더라도 울 만한 깊은 문제 앞에서 우는 것이고, 웃을지라도 참으로 하나님 앞에 기뻐할 만한 중요한 이유하에서 웃되, 사람이 깊어지고 건강해져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거룩되이 구별한 사람다운 정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거요. 그리고 그런 것을 도야하게 되어 있어요. 또 도야하라는 거예요, 그런 것을.

그러니까 그런 점에 있어서 우리가 찬송가가 많이 있을지라도 찬송을 새로 짓기 시작한 것이오, 우리 교회에서. 그런 뜻을 아세요. 이것이 얼마맡큼 효과를 냈는지 모르겠으나, 그건 우리 집사님들이 아실 것이오. 과거의 많은 해 동안 이 찬송을 부르면서 지내니까 과거에 다른 교회에 있을 때 찬송 부르면서 지내던 것보다는 의미가 있고 생각하는 방식도 항상 건실하고 건강하고 이렇게 나가든가? 여전히 감정주의적이고 감격적이고 그냥 어쩔 줄 모르고, 그리고 울고 매달리고 그리고서는 중요한 공의의 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사명의 문제에 있어서는 떡져 먹은듯 나는 몰라라 하고 다만 가서 복 받으면 좋겠다고 그러고 주여, 주여 하고 막 붙들고 매달리고 그렇게 되겠는가? 어느 편이 되는가? 그건 내가 가만히 관찰을 해보면 우리 교회의 집사님들, 교인들 다 보며는 우리 교회에서 이 찬송을 부르면서 자라나는 이런 상태 부지불식간에 다 항상 느긋해요, 마음들이. 마음들이 옛날 동양식으로 만들면 요조숙녀고 대인군자가 되어 가지고 있어요. 함부로 뭘 특별히 하려고 안해요. 괜히 울면서 야단내고, 괜히 그 센티멘탈리즘을 토로하려고 반절 울어가면서  멀리멀리 갔더니  하고서는 그렇게, 그건 찬송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슬픔, 감상주의를 나타내려는 그걸 않는다 그 말씀이요. 우리 교회 찬송가를 가지고, 혹시 우리 집사님들 누구라도 굉장한 감상적인 그런 심정이 있으며, 감상을 한번 표시해 보려고 그래요. 그것 잘 안 맞아요, 이 찬송 가지고는. 차라리 좀 그전에 있던 합동 찬송가에 있는 무엇을 끄집어 내어다가 불러야 그것이 좀 맞지, 서로 엊그제 같이 가령 형순이랑 헤어지고 돌아와서는 아! 멀리 갔다 멀리 갔다 하며는 우리 찬송가 어떤 것을 불러야 멀리 갔다는 내 센티멘탈리즘을 토로하겠느냐 하며는 하나도 없다 그거요. 암만 끄집어내도 하나도 없고 차라리  멀리멀리    차라리 그것을 부르든지,  돌아와돌아와    부르든지 그런 것을 하면 될른지, 그런 호소가 없어요. 가장 비교적 조금 애수가 있는   -  하지만 그것도 불러놓고 보면 아! 그게 아니고 이상의 세계, 어떤 아름다운 세계를 사모해서 나가는구나. 왜냐하면 그 찬송을 예루살렘에서 쓸 때에도 이 예루살렘이지만 이것 말고 참된 하늘의 예루살렘, 이걸 동경해 가면서 썼거든요. 그리고 갈릴리 바다를 보아가면서도 찬송을 썼고. 그러니까 아니다. 이것을 가지고는 요컨대 이런 센티멘탈리즘으로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언제든지 아름다운 세계를,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것을 동경하면서 살자. 이런 의미가 있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제가 지어놓고는 잔뜩 추기는 이야기가 되었는데, 찬송을. 하도 안 추겨 주니까 내가 추기는 거라   안 추기더라도 최소한 이런 의도와 목적이 거기 있다고. 이것을 불러 가지고 센티멘탈 하기를 바라지 않고, 광신(狂信)이 되기를 바라지 않고, 괜히 감상주의적 신자 되기를 바라지 않고 착실히 서서, 건실히 서서, 자기의 매일 생활을 진실하게 영위하면서 하나님이 요구하신 무엇을 해나가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하는 것이오, 그게. 그것이 참 중요한 일이지요.

그리고 또 하나는 아까 말한 대로 오늘날 시기에 있어서, 20세기에 와서 찬송이란 것이 타락해 갔어요. 그리고 영미에서 처음에 개혁자들은 찬송을 불러 나갈 때 첫째는 경건주의 운동과 퓨리탄 운동과 그런 것들이 섞여 가지고 찬송을 많이 만들어 불러서, 개혁 교회가 전통적으로 생각하는 비교적 엄숙하고 장엄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이 세상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우러러 보는 그런 찬송이 수가 그렇게 많지를 않아요. 수가 많지 않고, 그래서 교회마다 찬송을 선택해서 부르는 데도 다 교회 특성들이 있어요. 그러나 그 중에도 좋은 찬송들이 있어요. 옛날 십자군들이 생각했던 그 생각이라든지 칼빈 선생이 제네바에서 부른 찬송, 그런 건은 가사만 남았지만, 그런 것에다 붙일 때에 거기에다 센티멘탈한 곡을 붙여서는 안 되겠다 그말이오.  구주님 앞에 나왔나이다  하고서 구주 앞에 나왔다는 이야기부터 시작하게 딱 만들었어요. 그런 것이 얼마 좀 남았지요. 찬송이 영국이나 미국 계통에서 나온 이 현대 찬송이란 것이 많이 경건주의(pietism) 운동이나 종교적 정서 운동에 의해서 많이 침륜 당해 가지고 거기에 의거한 찬송이 많이 나왔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한국 사람의 센티멘탈리즘에 잘 들어 맞아요. 그래서 찬송을 만히 냈어도  단 이딘 디디디(만유의 주재 존귀하신 예수)    이런 것은 그렇게 만히 안 부르고  내 주를 가까이  하든지  멀리멀리 갔든지   웬 말인가    하든지 이 삼 박자식 스윙하는 흔들흔들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센티멘탈하게 삼 박자의 리듬으로서 천천히 움직이는 이것들을 다 좋아하게 되었어요. 과거부터 지금까지 부흥회 하는데 그런 것들을 쓰지, 부흥회 하면서는 장엄하고 자대하게 경건하게 택하는게 별로 없어요. 그것이 있다면 손가락으로 이 몇 손가락 안 되게 곱게 그게 몇 개 없어요.  예수의 이름 권세여  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성재, 성재, 성재  라든지 이런 것은 참으로 좋은 찬송인데 그것 비교적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 몇개 있고 나머지는  센티멘탈한 것과 막 뒤섞여요, 함께. 그래 섞어 가지고 야단이오.

그래서 이런 걸 보아서도 우리가 찬송의 새로운 기운을 반드시 불어 넣어야겠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새로운 찬송을 쓰기 시작할 뿐더러 이러한 것이 앞으로 생산이 되어 가지고서 이것을 가져다가 부르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것으로 훈련을 받고 그것으로 정서가 도야를 받아서 정서가 깨끗이 씻음을 받는다면, 그게 큰 유익이 되겠다 하는 생각이 있다 말이오. 가령 우리의 경배송 1번 같은 것은 감상적인 것에 호소를 안해요. 1번 경배송,  오 여호와      부를 때도 장엄하고 그리고 진정으로 속에서 우러 나오게 만들지 센티멘탈하게 쪼르르 눈물을 흘려가면서는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그런 소녀식 노래가 아니다 말이에요. 그런 것으로써 도야를 해 보세요. 주욱 사람의 정신을 길러 본다면 정신이 하나님 앞에 반듯이 튼튼하게 건강하게 되고 거룩되이 살아가는 게 소원인데, 그게 늘 좋은 보조가 된다 그거요, 그런 것들이. 그런 점에 있어서 우리가 가령 연속 찬송 1번을 하는 것을 하는 그런 찬송에서 얻는 은혜, 그것을 다 부르고 났을 때 가지게 되는 마음 가운데 경건하고 단장하고 또 숭엄한 심정, 그걸 나 자신은 우리 교회에서 불렀을 때 그런 심정을 과거에 많이 장로 교회에 살면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그거요, 그런 심정을. 그 많은 집회에도 가고 많이 불렀지만 그렇게 찬송 자체가 그렇게 경건하게 내 마음을 딱 압도하고 안정해 준다는 그걸, 또 계속적으로 연속 찬송을 불러 보세요. 그리고 부르는 순서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부르면 여기서 은혜가 있는 것이다고. 그러니까 꼭 찬송이라는 것은 넉절을 만들어 가지고 넉절을 반드시 반복하고 반복하고 이래야만 하는 것도 아닌 것이 거든요. 계속해서 성삼위송을 딱 불러 놓고 그러고서는 기도한 다음에 경배의 찬송을 부르면 그것 참 숭엄하고 좋은 것이라 말이오.

우리 교회에서 그것을 부를 때마다 그 전에 성약교회를 시작해 가지고 과거의 생활에서 이 찬송을 가지고 딱 새로운 찬송을 부르는 시초 때는 현저한 대조가 있던 것을 느꼈어요. 시방은 하도 많이 불렀으니까 이제 많이 익어서 또 다른 찬송을 늘 안 부르니까 그게 없지만 그때는 다른 많은 찬송을 부르고 살다가 그리고 탁 와서 이렇게 하자고 이렇게 끌고 나아갈 때 현저하게 마음 가운데는 간절한 심정이 생기고 다 그랬죠. 이것 내가 실험을 해 봤어요. 전주서 못난이를 데리고, 못난이 회에서 합창단 70명을 데리고서는 그걸 죽 해볼 때 그 만당(滿堂)에 앉은 수천명 사람이 다같이 숙연하면서 참 마음 가운데 신성함을 느꼈다는 거요. 음악이라는 것, 찬송이라는 것은 신성한 심정을 주어야 하는 거요. 비통할지라도 죄에 대한 비통한 심정이 있을 때 그래도 신성해야 하는 거요. 그러니 감상적으로 변하고 향락적으로 변하면 안 된다 그거요. 찬송들이 참 좋은 데요. 그러한 찬송 가운데서 늘 지내면 좋아요.

그럴려면 그 예배 자체가 항상 숭엄하고 신성하고 단정해야 해요, 예배 자체가. 예배가 그냥 잡다하게 되면 안 되는 것이요. 참으로 경건한 심정 가운데 다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가지고 경외 심정으로 섰습니다. 이것이 저희 마음을 지배해야 해요. 우리가 그런 연속 찬송 같은 것, 연속 찬송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에서 예배하는 프로그램에 의해 집행할 때 그런 숭엄성을 느끼지 않아요, 마음 가운데? 경건히 단정히뿐 아니라 엄숙히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그것 있지요, 다? 그래서 예배하는 심정이 어쩐지 엄숙히 딱 지배를 하지요? 그게 그런 것을 주장하는 것이지 누가 무슨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말을 길게 했다는 것도 아니고 주로 찬송할 때 찬송을 하면서도 그 찬송이 무슨 정서를 일으키는가에 많이 달린 것이오. 찬송이 꽉 단속을 해주는가? 엄숙하게 숭엄하게 해주는가? 찬송이 향락적이고 그러고서는 재미있게 만들어 주는가? 단순한 재미가 아니지요? 그냥 재미뿐만 아니라 이제 이런 데서 우리 성약교회의 특성이라는 것이 벌써 하나 지어져 가지고 있어요.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는 성약교회로서는 특성을 잘 살려 나가는 것이 이 시대의 혼탁한 교회의 현실에 우리가 마땅히 취할 태도인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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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6_1_pic2.jpg고(故) 허암(虛菴) 김홍전(金弘全) 목사 약력

1. 생애
1914년 11월 15일 충남 서천군 화양면 지사리에서 김영배(金永培) 선생과
이숙정(李淑正) 여사의 장남으로 출생
1939년 3월 28일 김가일 여사와 혼인2003년 7월 6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안식에 들어감

2. 학력
1932년 3월 서울 경신학교 졸업
1950년 9월 - 1951년 5월 미국 델라웨어 주 소재 Faith 신학교에서 공부
1951년 6월 - 10월 미국 미시간 주 소재 Central Conservatory of Chicago에서 작곡학 연구,Symphony in D minor로 명예 음악박사 학위 취득
1954년 9월 - 1955년 6월 미국 필라델피아 주 소재 Dropsie 대학에서 공부 (Ph. D. Candidate)
1955년 6월 - 11월 이스라엘 정부 및 The Jewish Agency 초청으로 이스라엘에 가서 이스라엘과 중동의 문화․사회․인류학과 언어 등을 연구
1955년 11월 - 1956년 5월 미국 버지니아 주 소재 Union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 취득
1956년 6월 - 1957년 5월 위의 학교에서 사해 축서(死海軸書)를 연구하여 신학박사 학위 취득
(학위 논문: The Messiah Idea in the Dead Sea Scrolls)
3. 경력
1934년 4월 - 9월 일본 도쿄(東京)에서 음악 개인 수업을 받음
1935년 10월 - 1937년 8월 평양에서 말스베리(Dwight R. Malsbary) 박사에게 작곡학과 피아노를 배움
1935년 - 1937년 평양에서 기독교 월간지 『겨자씨』의 논설위원
1937년 9월 - 1938년 3월 군산 멜볼딘 여학교 음악 강사
1938년 4월 - 11월 일본 도쿄에서 음악 연구
1939년 4월 - 1940년 10월 평양에서 다시 말스베리 박사에게 작곡학을 배움
1940년 11월 - 1944년 3월 전주에서 음악 개인 교수 및 영생보육학원 음악 강사
1944년 4월 - 1945년 8월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일체의 직(職)을 갖지 못하고심한 환난 중에 지냄
1945년 8월 - 11월 전라북도 교향악단 조직, 작곡․편곡․지휘, 9월과 11월에 두 차례 발표회 가짐
1945년 11월 - 1948년 8월 전라북도 미군정청 군정지사의 수석 고문관 및 보좌관
1949년 3월 - 12월 대한예수교장로회 편집 표준성경주석의 번역 위원 (『이사야서 주석』 번역)
1949년 12월 - 1950년 초 태국 방콕서 개최된 국제기독교협의회(ICCC) 지역회에 참석, 부의장에 피선. 귀국 길에 필리핀에 들러 연합신문사 명예 이사 자격으로 당시 대통령 퀴리노 씨와 태평양동맹 건에 대해 면담
1950년 7월 - 9월 피난 도중 국제기독교협의회의 초청으로 미국을 거쳐 스위스 제네바에 가서 제2차 국제기독교협의회 총회에 참석하여 전쟁 가운데 있는 한국의 사정에 대해 수차례 강연
1950년 9월 - 1951년 11월 미국 여러 곳에서 조국의 사정에 대해 강연 또는 라디오와 TV 방송
1951년 11월 - 12월 필리핀 마닐라에서 개최된 극동기독교협의회에 참석, 임시 의장․헌장 기초 위원장․부의장 역임 (ICCC의 근본주의적 성향과 정치적 색채 때문에 이후 거리를 둠)
1952년 4월 - 1954년 8월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 출판부장 겸 월간 『복된 말씀』 주간
1957년 9월 - 1960년 5월 대전 기독학관(현 한남대학) 학장 고문 겸 이사회 고문 (남장로교가 WCC에 가입하자 사임)
1960년 8월 - 1962년 9월 민국일보 사장 겸 발행인. 민국일보사 해산으로 그 직위를 떠남
기 타 관동대학 재단이사장, 극동방송 이사장, 외무부 외교자문위원회 위원 역임
이상과 같이 음악계, 학계와 교육계, 언론계, 심지어 정치계에까지도 뛰어난 은사를 발휘하였는데, 이 모든 것은 독립개신교회를 세우고 섬기기 위한 준비 과정이라 할 것임
4. 목회 사역
1963년 성경 공부 시작
1964년 1월 5일 성약교회 시작
1964년 6월 - 9월 일본 도쿄, 교토(京都), 홋카이도(北海道) 등지에서 설교와 신학 강의. 강설의 일부가 도쿄에서 일본어로 출판됨 (『복음이란 무엇인가』, 1966년)
1967년 5월 - 1970년 10월 도쿄 기독교대학 교수로 선교 사역 (성약교회와 겸임하여 6회 방문하며 사역함)
1968년 4월 일본에서 영도(榮都) 교회 시작
1974년 11월 8일 캐나다로 이주, 후에 토론토 지역 교회 시작
1978년 11월 - 1998년 1월 열 차례 한국을 방문하며 독립개신교회를 돌보았고 세 명의 목사(김명순, 정병길, 김헌수)의 임직 절차를 주관함
5. 저술
『창세기와 누가복음』, 『사도행전』, 『신약 개론』, 전주: 복된말씀사, 1953.
『복음이란 무엇인가』, 도쿄: 생명의 말씀사, 1966.
성약출판사에서 『복음이란 무엇인가』, 『찬송』, 『하나님의 백성』(전 3권), 『사사기 소고』(전 3권), 『이스라엘 열왕의 역사』(전 4권), 『예수님의 행적』(전 10권), 『교회에 대하여』(전 4권)를 포함하여 현재까지(2003년) 총 63권이 출판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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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최낙재 목사  |  1강.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이까?"  |  사도행전 1:1-11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 시기를 여쭘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쭈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이에 대답하시기를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신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대화의 말씀을 슬쩍 읽고 지나가면 제자들이 묻는 문제에 대해서 예수께서 똑바로 대답하시지 않고 다른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의 때를 여쭈었는데 ‘그것은 너희의 알 바 아니다’ 하시고 성신이 오실 것과 성신으로 말미암아 능력을 얻어서 예루살렘에서부터 점차로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존경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문제를 회피하는 것 같고 동문서답(東問西答)하는 것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예수께서는 친제자들이 아닌 정적(政敵)이 질문이나 힐난의 말을 할 때에도 결코 문제를 회피하시거나 동문서답하시는 법이 없었습니다. 언제든지 정공법(正攻法)을 택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실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이 부족하거나 무엇이 두려워서 문제를 회피하실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 친제자들이 여쭈는데 이들에게 문제를 회피하시거나 동문서답하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사람들이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 문제를 바로 보지 못하고 중요하지 않은 질문을 하거나 그릇된 길로 들어가서 그릇된 요구나 청을 할 때에 문제의 본질을 보게 하시고, 그 사람을 바로잡아서 마땅히 생각할 것을 생각하고 마땅히 구해야 할 것을 구하게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3:22-30에 그런 예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구원을 얻을 자가 많은가 적은가 하는 그런 사람의 호기심을 채워 주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구원을 얻는 일이 중요한 일입니다. 구원은 그 기회가 항상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은혜를 받을 만한 때가 있는 것인데, 그 기회를 허술히 보내 버리면 다시는 그 기회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실 때에 속히 죄 사함을 받고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뜻에 사로잡혀 새로운 삶을 살고 거룩하게 살고 악행을 그쳐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없이 구원을 받는 일은 등한히 하고 혈연이나 지연이나 무슨 안면이 있다 하는, 이런 현세적으로 맺은 유대 관계를 의지하고 나가다가는 낭패를 당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구원을 얻을 자가 적은가 많은가에 관하여는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구원을 얻는 것에 관하여,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할 점들을 말씀하셨습니다. 위대한 스승이십니다.
또 한 번은 어떤 사람이 형제간 재산 분배의 문제로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2:13 이하에 기록된 내용인데,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여기에 형이라고 했는데 우리나라 말에는 형과 동생이 따로따로 구별되어 있지만 어떤 나라 말에는 형과 동생의 구별이 없이 그냥 한 단어로 형에게도 쓰고 동생에게도 씁니다. 좌우간 형제간입니다. 이렇게 하니까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셨습니다. 형제간에 부모의 재산을 공정하게 나누는 일로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했을 때에 거기에 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냥 돌려보내지 않으시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 문제를 바로 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사람이 자기의 생명을 유지 .보존하기 위해 ‘내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 하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재물이 있어야 한다’ 하고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의지하는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거기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다음의 비유를 더하여 주셨습니다(16-20절).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참이스라엘 사람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염원함

주 예수의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사람들이 ‘네가 거기서 내려오면 믿겠노라. 네가 그리스도라면 거기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이렇게 반대하면서 조롱하며 예수께 괴로움을 더했는데,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이신 것이 확고하게 된 지금 제자들이 예수께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고 여쭌 것은 자연스럽고도 당연하기까지 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자기 나라의 역사를 알고 국민으로서 ‘나는 다른 나라 사람이 아니고 이스라엘 나라 사람이다’ 하는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연히 이러한 질문을 할 것입니다. 그냥 먹고사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첫째로,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1-3) 하셨습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의 자손이 많아졌을 때 모세를 통해 그들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출하여 내시고, 율법을 주셔서 그 율법으로 국민 생활을 하게 하시고,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고 율법에 따라서 거룩하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 후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점령해서 살게 하였는데, 여호수아와 그의 세대가 지나간 뒤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을 구원하신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자기들의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셔서 그들을 마음대로 하라고 이웃 나라 왕의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이웃 나라가 와서 살육과 약탈을 하므로 백성이 견딜 수가 없어서 여호와께 부르짖을 때에는 여호와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기드온, 입다, 이런 여러 사사들을 보내셔서 그 백성을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다가 사무엘 시대에 와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 다윗을 세우셔서 모든 대적을 물리치게 하시고 백성들을 평안히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솔로몬 왕 때에 가서 왕이 우상을 섬기게 되자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 왕 때에 나라가 남북으로 이스라엘과 유다로 나뉘게 하셨고, 그 두 나라가 병립해 나가다가 북조 이스라엘은 주전 721년에 아시리아(Assyria)에 망하고, 남조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게 망해서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가게 되었습니다. 자기 땅에서 살지도 못하고 먼 나라로 포로로 잡혀 가서 거기서 노예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왕도 없고 나라도 없이 이 중동 지방 여러 곳에 흩어져서 노예 생활을 하는 아주 불쌍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나라가 무너져 가는 때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세우셔서 하나님의 진노의 뜻과 소망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보내어 북방 모든 족속과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거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하여 그들로 놀램과 치소(嗤笑)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영한 황무지가 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 소리와 등불 빛이 끊어지게 하리니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렘 25:9-11).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칠십 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다가 후에는 바벨론 왕을 벌하시고 돌아오게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 열조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렘 16:14-15). 이스라엘 나라나 유다 나라가 이웃 강대국에게 멸망을 당하고 포로로 잡혀 가서 고생을 할지라도 칠십 년 동안 그렇게 하고 그것으로 끝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 그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오며 그와 함께 유다 자손이 돌아오되 그들이 울며 그 길을 행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 그들이 그 얼굴을 시온으로 향하여 그 길을 물으며 말하기를”, 먼 나라에서 시온을 찾아서, 예루살렘을 찾아서 오니까 길이 어떻게 되는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 그 길을 물으면서 말하기를 “너희는 오라. 잊어버리지 아니할 영영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연합하자 하리라”(렘 50:4-5). 이렇게 마침내는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올 것을 예언하여 놓았습니다. 예레미야의 이 예언으로 인하여 다니엘도 그때를 당해서 그것을 기억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또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조서를 내려서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성전을 짓고 거기서 살라’ 하므로 갈 만한 자들이 돌아가서 에스라, 느헤미야, 이런 하나님의 종들의 활동으로 돌아온 소수의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국민 생활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시편 137편은 그 포로 기간 중에 쓴 시입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저희 말이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 하였나이다.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유복하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 

이것은 단순히 고향을 기리는 망향(望鄕)의 시가 아니고 예언에 기초한 믿음과 소망의 시입니다.
참이스라엘인은 선지자의 예언을 믿고 바벨론의 멸망을 믿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소망하였습니다. 멀리 이곳저곳에 흩어져 살다가 아무리 왕의 허락이 내렸어도 교통이 발달되지 않은 그 시절에 걷거나 짐승을 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면 먼 길인데 그 먼 여행길에 안전이 보장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돌아온 사람들은 소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국민 생활이 시작이 되었지만 그 후 이때까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까지라도 이스라엘은 다윗 시대나 솔로몬 시대와 같이 왕을 세우고 성전을 짓고 이스라엘 본연의 국민 생활을 떳떳이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페르시아, 그다음에는 그리스의 알렉산더와 그의 부하들, 그다음에는 로마가 차례로 이스라엘 땅을 점령하고 다스렸습니다. 

그러니까 참이스라엘 사람은 당연히 이스라엘의 회복을 염원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정신이 다 빠지고 그냥 현세에서 어떻게 하면 잘 먹고 잘살까 해서 로마의 세력에 붙어 버린 사람들이야 이스라엘의 회복을 간절히 기다릴 이유가 없겠지만,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라고 바랐던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을 중심으로 다윗 왕국과 같은 나라를 세워서 하나님의 백성이 태평성대를 누리기를 바랐습니다. 베드로, 요한, 안드레, 마태와 같은 제자들도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언제나 되려는가 하고 바라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메시야, 곧 그리스도이심이 확실하게 되었으니 이제 거사를 해서 나라를 회복시키시는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예언한 이스라엘의 회복

그러나 선지자들이 예언한 이스라엘의 회복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던 것과는 훨씬 달랐습니다. 시편 110편에서 예언한 것을 보면, 장차 시온에서 왕으로 통치하실 그분은 다윗의 주(主)일 것입니다. 항상 메시야는 다윗에게 언약하신 것이 있어서 다윗의 자손 가운데에서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차 임금으로 오실 메시야, 곧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일 텐데, 사람들이 이 점을 이해하기 어려웠겠지만 다윗의 주라고 불리는 분이십니다. 이분이 그 나라를 다스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왕이신 동시에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이실 것입니다. 왕이신 동시에 영원한 제사장이신 점도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어려운 점일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대로 레위 계통의 제사장이라면 그것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한 사람이 레위 계통의 사람도 되고 다윗 계통의 사람도 될 재주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편 110편의 예언대로이고,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따르면 그는 영원하신 제사장일 뿐 아니라 또한 친히 제물이 되셔서 자기의 백성을 위하여 대속의 고난을 받으실 분이셨습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시고 피를 흘리시고 죽임을 당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각하기 어려운 점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깨달음이 거기까지 미치기가 심히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렇게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면 그다음으로 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다스릴 백성들은 누구인가? 물론 먼저 사로잡혀 간 북조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 후에 망한 남조 유다가 다 돌아와서 통일 국가를 세울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이지만 이번에는 유다만의 통치자가 아니고 통일 왕국을 세울 것입니다. 예레미야 50:4을 보면 그렇게 예언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날 그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오며 그와 함께 유다 자손이 돌아오되 그들이 울며 그 길을 행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할 것이며.” 나뉘었던 남.북조, 곧 이스라엘과 유다 이 두 나라의 백성들이 다 함께 와서 한 왕을 섬기고 그의 백성이 될 것이라는 것이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백성들이 훨씬 더 많아질 것을 선지자들이 또한 예언했습니다. 호세아 1:10을 보면,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여기서 ‘자녀’나 ‘백성’은 서로 엇바꿔서 썼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곧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옛날 왕국 시대에 다윗 왕국의 백성이면 다윗 왕국의 자녀인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그 백성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와 같이 백성과 자녀를 엇바꿔서 썼는데, ‘전에 도무지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하고 불리게 될 사람들이 많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이스라엘 백성 중에 가담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될 때에는 그 나라가 이 팔레스타인에 한정되지 않고 광범위하게 될 것입니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을 것입니다.

높이 되신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나라

이렇게만 볼지라도 장차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면 옛날에 찬란하던 그 다윗 왕국과는 현저히 다를 것입니다. 훨씬 더 영광스러운 나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신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아무 관계없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관계있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고, 훨씬 더 영광스러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리의 성신을 힘입어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를 온 땅에 확실히 전파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나라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헤아릴 수 없이 무수한 백성이 나와서 그의 백성이 될 것이고, 하나의 통일된 나라를 이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다스리실 왕위에 오르신 사실을 온 천하에 전파한다는 것은 지극히 중대하고 기쁜 소식입니다.

과연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가 보는 데서 승천하셨고, 열흘 뒤 오순절 날에는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증언하여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예수를 높이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히셨으며, 예수께서 성신을 아버지께 받아서 부어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하고서 뭇사람 앞에 선언하였습니다. 옛날에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왕으로 세우심으로 다윗이 하나님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에 큰 평안과 안정과 기쁨이 있게 하셨듯이 이제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곧 그리스도이시고 이 예수 그리스도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셔서 영원히 다스릴 왕위에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영원하신 왕 예수 그리스도는 팔레스타인에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위에 있는 예루살렘, 곧 하늘의 예루살렘에 도읍을 정하시고 유다와 이스라엘과 모든 이방 나라 중에서 백성을 불러 모으시고 다스리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것을 오순절 날에 선포한 것입니다. 군대와 총칼을 써서 나라를 다스리시는 대신에 성신의 능력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스리시고, 항상 살아 계셔서 그 백성을 보호하시고 다스리십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와 온유한 자에게 복을 주시고 보호하시며, 그 백성이 땅에서는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고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을지라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질 수가 없으므로, 그들이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같은 것도 능히 이길 수가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이 영원하신 우리의 임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백성에게 성신을 주셔서 그의 능력을 힘입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행하게 하시고, 주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시고,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성신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진리가 풍부한 광대한 나라요 영원한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시는 때에는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나라로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지방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한 후에 이르기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 6:15-16) 했습니다. 지상의 나라 이스라엘과는 혈연으로 아무 상관이 없는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이스라엘 나라가 그렇게 영광스럽게 회복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무엇인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언제 회복되는가 하는 것을 말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일일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 그 일이 이루어질 때에 누가 이때라 하고 알려 주지 않을지라도 스스로 ‘그때’를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항상 문제의 본질을 아시고, 따르는 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말씀하시고 가르쳐 주십니다.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신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7-8). 이스라엘의 회복과 직결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아버님께서 온 땅 위에 아버님의 큰 경륜을 이루실 때에 아브라함 이래 많은 선지자들에게 예언하셨던 바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스럽게 이루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셨던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영광스럽게 이루어 주셨사옵나이다. 저희로 하여금 눈을 높이 들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을 바라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의 나라가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할 것을 저희가 바라볼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신의 강력한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쓰셔서 저희에게 복을 주시고, 저희를 새롭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을 저희가 볼 수 있게 하시고, 맛볼 수 있게 하시고, 그 가운데에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나라가 참으로 강력하고 오늘날도 살아 있으며 오늘날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능력이 저희에게까지 미치고 저희를 보호하시며 저희를 인도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저희 가운데에서 다스리시는 사실을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더욱더 배우고 확신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그러므로 저희가 이때가 어느 때인 줄을 알게 하여 주시고,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모두 다 마땅히 그리스도의 발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오나 저희가 먼저 그리스도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모든 교훈을 순종하며 그것을 저희의 생활에서 준행하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991년 12월 15일 주일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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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낙재 목사  |   2강.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사도행전 2:14-47

14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15때가 제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16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19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奇事)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22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 23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 24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25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26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27이는 내 영혼을 음부(陰府)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28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29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30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位)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31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32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33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신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34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35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36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이하 생략) 



베드로가 선포한 말씀의 요지

이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은 오순절에 예루살렘에서 베드로 사도가 열한 제자와 함께 서서 모여든 사람들에게 선포한 복음의 내용과 그 말씀을 들은 결과를 적어 놓은 것입니다. 모여든 사람들은 누구였느냐 하면 거기에 보면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아’ 하였고 또 ‘이스라엘 사람들아’ 하기도 하였습니다. 오순절이니까 예수께서 유월절 곧 성력으로는 1월 14일에 잡혀 죽으시고, 50일 후 곧 성력으로 3월 초순 언제가 되고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간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시다가 승천하셨으므로 승천하신 지 8일 뒤의 일입니다. 날짜를 셀 때에 사흗날에 부활하시고 그날까지 포함해서 40일간 보이셨다고 치고 승천하신 날까지 포함해서 세면 8일이 됩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에 8일째가 오순절이 됩니다.

그날에 베드로가 선포한 말씀의 요지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의 대표적인 행적(行蹟)을 말하고, 죽으심, 부활하심, 승천하심, 또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것을 말했습니다. 특별히 구약 성경을 인용해서 확증한 것은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셔서 약속하신 성신을 아버지께 받아 보내 주신 것이라고 한 것이 한 가지고, 그다음 중요한 것은 다윗이 시편 16편에서 예언할 때에 어떤 말은 다윗 자신의 부활을 예언한 듯하지만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그냥 그대로 있고 실상은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스도를 세워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실 것을 알고, 그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것이 이제 이루어졌다는 것이고, 이어서 다윗의 이 자손은 다윗의 자손일 뿐 아니라 다윗의 주도 되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의 우편에 앉히시고 모든 원수로 그 발아래 굴복케 하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결론으로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36절)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쭉 종합해서 생각해 볼 때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하신 것이 곧 그로 하여금 다윗의 왕위에 오르게 하신 것이고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로부터 하늘의 예루살렘, 곧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것입니다. 약속하신 대로 예수께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로서 다윗의 위에 오르시고 다스리신다 하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알리는 이 기쁜 소식이 선포되자 유대인들, 곧 이스라엘 백성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에게는 큰 기쁨이 있었고, 결과가 뚜렷이 나타났습니다. 3천 명이나 되는 무리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고 제자의 수에 가담했습니다. 이 무리가 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며 신앙의 공동체를 이루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기도하기를 힘썼습니다. 또 백성들이 칭찬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오는 사람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도 움직이지 않았고,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과 대제사장들은 모여서 더욱 반대하고 핍박하기까지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위에 오르시고 다스리시기 시작하실 때에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성신의 능력으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심을 환영하고 기뻐하며 거룩한 백성이 되었고, 다수의 이스라엘 백성은 반대하고 대적했습니다. 이들이 다 유대인이고 하나님의 백성의 표인 할례를 몸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다 동일하게 취급할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 2:28-29). 신령(神靈)에 있다는 말은 영(靈)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신령에 있다 하는 말은 ‘성신께서 하시는 것이고 할례는 성신께서 마음에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하신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의문(儀文)이라는 것은 문자라는 뜻입니다. 문자로 법을 딱 정하여 ‘어떠어떠한 사람은 할례를 받을 것이다’ 하면 그대로 해서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성신께서 해야 할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2장에서 이렇게 말씀한 것은 진리이고, 이러한 역사적 현실을 놓고서 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자기의 백성을 유대인 가운데에서,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에서 부르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이방인들, 곧 모든 나라의 백성 중에서도 부르셨습니다. 사도행전을 읽어 내려가면 그리스도의 이름이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될 때에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믿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첫째로, 로마의 군인 백부장 고넬료가 자기의 가족과 친지를 다 모아 놓고 베드로 사도더러 오시라고 하여 그의 입에서 복음을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에 스데반의 핍박으로 흩어진 무명(無名)의 신자들이 시리아의 안디옥에 이르러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하셔서 수많은 사람이 믿고 주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안디옥에 이방인 교회가 섰습니다. 그리고 또 보면 그 후에 바울 사도와 바나바는 이곳에서 출발하여 다른 지방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비시디아의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는 온 성이 다 그의 말을 들으러 왔고, 거기서도 유대인들의 많은 반대 속에서도 믿고 나오는 이방인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시고 왕이 되신 사실과 그를 힘입어 죄 사함을 얻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하는 복음이 퍼져 나갔습니다. 성신을 받고 권능을 얻은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서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이 사실들은 변동이 없는 진리로서 세상 끝 날까지 계속적으로 전파되어 나갈 것입니다.

신정(神政) 왕국의 회복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서,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쭈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자기 나라의 역사를 알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알고 또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예언을 아는 사람들로서 예수께 기대를 가지고 여쭌 질문입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예수께서는 이 사람들의 질문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깨닫고 하는 질문이 아닌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들의 질문을 따라서 ‘그 때’를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질문 그대로 곧이곧대로 ‘언제가 이스라엘의 회복의 때다’ 하고 대답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질문을 일축하시고 그 문제에 전혀 대답하지 않으셨느냐 하면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 명령을 순종하면 때가 될 때에 자기들이 숙제로 생각했던 문제가 다 풀릴 만한 그러한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때와 기한은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신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조급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좀 기다려라’ 하고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즉시 시원한 대답을 주시지 않았을지라도 제자들을 가장 잘 이해하시고 때가 되면 그 중요한 문제를 환히 알 수 있도록 아주 자애로운 말씀으로 대답해 주신 것입니다. 과연 사도행전이 가르쳐 주는 대로 따라가면서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을 잘 보면, 이스라엘 나라를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의 통치의 권세는 실로 광대하고 영원하며, 그의 나라는 거룩하고 안전하며 기쁨이 있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바라는 사람들의 기대에 훨씬 뛰어넘게, 기대 이상으로 훌륭한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훌륭한 나라를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생각했는데, 잠깐 옛날로 돌아가서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질 그때를 살펴보십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나라의 회복을 바랄 때에는 남쪽의 유다, 북쪽의 이스라엘, 이렇게 남.북조로 갈라져 있던 때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통일된 나라,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동경하였던 것이고, 선지자들도 항상 높고 공의로운 임금 아래에서 하나가 된 통일 국가를 말하였습니다.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할 때에는 항상 통일 국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누어진 나라가 아니라 통일 국가를 늘 예언했던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나라가 한 나라로 건설되던 때를 말하는 구약 성경의 말씀을 두어 군데 읽겠습니다. 사무엘하 2:1-4,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가라사대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다윗이 그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 때에 또 자기와 함께한 종자들과 그들의 권속들을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에 거하게 하니라.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더라.” 

다윗이 사울의 시기를 받아서 왕 곁, 왕궁에 있지 못하고 또한 자기 집에 평안히 있지 못하고 산으로 들로 유리하며 쫓겨 고생하고 살다가, 사울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그 아들 요나단과 함께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한 후에 여호와께 여쭈었습니다. ‘내가 유다의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올라가라. 어디로 올라가리이까? 헤브론으로 가라.’ 헤브론은 예루살렘에서 남남서 19마일쯤, 그러니까 우리나라 이수로 한 80여 리 되는 산간 지대에 네 부락으로 이루어진 성읍입니다. 여기에 보면 ‘헤브론 각 성에 거하게 하니라’ 하였는데 거기에 성들이 많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곳을 지시하여 주심으로 다윗은 가족들을 데리고 올라가서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았습니다. 그러자 유다 사람들이 와서 다윗을 유다 족속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열두 지파가 단단히 결속한 것이 아니라 먼저 유다 지파가 결속해서 다윗을 왕으로 기름을 부었으므로 다윗은 이 헤브론에서 7년 반 동안 유다를 다스렸습니다.

그다음 사무엘하 5:1-5,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전일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자는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이에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헤브론에 이르러 왕에게 나아오매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여호와 앞에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매 저희가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니라. 다윗이 삼십 세에 위에 나아가서 사십 년을 다스렸으되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다윗이 헤브론에서 유다 왕이 되어서 유다 족속을 7년 반 동안 다스렸는데, 그동안에 사울의 군대 장관 아브넬이 사울의 남은 아들 이스보셋을 옹립하고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으므로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있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끌어갈 때에 다윗은 점점 강해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졌습니다. 그러다가 아브넬이 죽게 되고 이스보셋은 자기의 부하에게 시해를 당했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헤브론으로 다윗을 찾아왔습니다. 와서 말하기를 ‘보소서,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 - 우리는 같은 아브라함의 피를 받은 형제입니다. - 전일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자는 왕이시었고 - 물론 사울의 다스림을 받았지만 - 당신이 우리 백성을, 특별히 우리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갈 때 우리가 당신을 따라서 나가지 않았습니까?’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사울 시대에 우리의 군대 장관이 바로 다윗 당신이 아니었습니까?’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려고 하시는 뜻을 온 이스라엘이 읽고서 이와 같이 청하므로 다윗이 그들과 언약을 체결해서 그들의 왕이 될 것을 허락하고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그의 통치를 받을 것을 약속하였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어느 시대나 항상 하나님께서 주가 되시므로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시되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시기를 원하셔서 다윗을 왕으로 삼고 이스라엘을 그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런 뜻을 받들어서 다윗이 백성과 언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렇게 하자.’ 이렇게 해서 다윗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통일시키고 다스리게 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성전을 세울 준비를 해서 자기의 아들 솔로몬 때에 그것을 완성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세상에서 아주 특이한 한 나라가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왕국이 이스라엘에서 출범하게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 경배하며 그를 섬기고,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을 따라서 국민 생활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이 사사 시대의 혼란과 외국의 침략을 벗어나서 나라가 태평을 누렸습니다. 나라가 평안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다윗 시대만큼 나라가 안정되고 평화로웠던 때는 없었습니다. 이웃 나라 중에 아무도 이스라엘을 넘보지 못하고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이스라엘 백성이 외국에 가서 노예 생활을 하고 그 후에 자기 땅에 돌아왔을지라도 이스라엘의 주권자는 없고 남의 나라의 억압 통치를 받아야 했기 때문에 그들로서는 다윗 시대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언제 그런 때가 올까? 옛날 다윗 때와 같은 그런 때가 왔으면 좋겠다’ 하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막연하나마 그런 시대로 바라고 그리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하실 때에는 겨우 옛날 좋았던 시절로 돌아가게 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 시대보다도 모세 시대보다도, 혹은 다윗 시대보다도 훨씬 큰 은혜를 베풀려고 하시는데, 그중 한 가지는 이제는 모세나 선지자를 보내셔서 은혜를 끼치고 일을 성사시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들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나신 분, 하나님의 독생자를 보내시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전과 레위 제사장과 짐승의 제물로 하나님께 나아와서 사죄와 평안과 기쁨을 갖는 데에서 진일보하여 예수께서 친히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시고, 참되고 영원한 제사장이 되시고 또한 제물이 되셔서, 이를테면 가버나움의 중풍병자에게 그가 회개할 때에 무슨 번잡한 성전 예식 같은 것을 치르지 않을지라도 즉석에서 그 마음을 아시고 사죄의 은혜를 베푸신 것같이 아주 직접적이고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여러 여건이 하나님의 은혜로 더욱 좋게 마련되었지만 무엇보다도 다윗보다 뛰어나신 분,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 되신 때문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룩하시고 능력이 한량없으시며 사랑이 많으시고 지혜가 풍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백성들이 그렇게 큰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니고데모가 예수께 나아왔을 때에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관심이 있었고, 그러한 만큼 일반 대중보다 훨씬 앞선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하여 무지하였습니다. 그는 성신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기본적인 진리를 몰랐습니다. 그것은 또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는 합리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합리주의자보다 훨씬 낫고, 하나님의 계시에 주의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것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합리주의자보다 훨씬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 사람입니다. 또 ‘기적, 기적!’ 하고 기적을 따르는 신비주의자보다도 훨씬 나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상당히 가까이 나아간 점이 그에게 있었을지라도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데에는 미치지 못했던 것을 우리가 요한복음 3장을 쭉 읽어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와 대화하시면서 가르치실 때에 ‘이스라엘의 선생이 되려면 이런 것은 다 알아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면서 마침내는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14-15절) 하셔서 인자를 믿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 - 영원한 생명 - 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이렇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를 믿어야 할 것을 그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의 의미를 잘 몰랐듯이 니고데모도 하나님의 나라를 말은 하면서도 바로 알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그 나라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하고, 믿지 않았던 데에 그 원인이 있었습니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아버님의 무한한 사랑으로 저희에게 거룩하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그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의와 평안과 기쁨이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심을 감사하옵나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저희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높으시고 권세가 크시고 영원히 그 백성을 다스리실 분인 것을 바로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가 어떻게 영광의 주가 되시며 공의로 그 나라를 다스리시고 그에게 풍부한 자비가 있는가를 저희로 하여금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의 나라를 세우신 것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참으로 큰 은혜요 이 땅을 위해 참으로 큰 복이 되는 것을 저희로 하여금 알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 나라이며 저희는 그 나라에서 어떠한 자리에 있는가를 잘 알게 하여 주셔서, 저희로 하여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살게 하여 주시고, 오직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모든 충성을 다 드리고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992년 1월 5일 주일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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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낙재 목사  |  3강. "이스라엘 나라는 오로지 성신의 능력으로 회복됨"

히브리서 1:1-14 

1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4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5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6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 말씀하시며 7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그는 그의 천사들을 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8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9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주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10또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 11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 하였으나 13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14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제자들에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할 사명을 주심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이 예수께 여쭙기를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였고, 예수께서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신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지난번에 우리가 생각한 대로 제자들의 질문을 거절하신 것도 아니고, 물론 회피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께서 어떤 질문을 어떻게 대답하기가 어려우셔서 회피하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회피하신 것도 아니고 거절하신 것도 아니고 오직 제자들의 믿음과 소원과 깨달음의 정도에 알맞게 대답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항상 친절하시고 지혜로우시고 자애(慈愛)가 가득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답변의 요지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되 예루살렘과 이 유대에서만이 아니고 사마리아에도, 또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서 땅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라는 것이고, 성신의 능력을 힘입어서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과 관련이 있는 것이고, 이 일을 잘 완수하는 것이 곧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이루는 일인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의 때를 여쭙는 제자들에게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키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때만 기다릴 것이 아니고 너희가 나가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켜야 할 것이다’ 하고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키는 일을 시행하려고 하시는 것이고, 예수께서 친히 그 일을 하려고 하시는 것이고, 제자들을 그 일에 종으로 사역자로 쓰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큰일은 성신을 힘입지 않고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신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니고데모에게 이와 같이 대답하신 대로 성신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듯이 또한 성신의 능력으로 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할 수가 없습니다. 오순절에 베드로 사도가 성신의 능력을 힘입어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것을 선언했습니다. 후에 스데반은 지혜와 성신으로 변론을 하므로 회당의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다음에 보면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하러 나가서 더베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지방을 지나서 아시아 도(道), 지금 터키의 일부 지역에 이르렀을 때에 성신이 거기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다음에 브루기아와 갈라디아를 지나서 무시아 앞에 이르러서 거기서부터 북동쪽으로 비두니아로 가고자 힘썼는데, 그때에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서쪽으로 더 나아가서 드로아에서 환상을 본 후에 유럽의 첫 성인 빌립보로 향하여 갔습니다. 이것을 보면 이 바울 사도도 자기 스스로 한 것이 아니고 성신의 인도를 받아서 전도의 방향과 길을 정하고 나아갔습니다. 성신께서 주가 되시고, 바울은 전적으로 성신을 의지하고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할 때에도 능력과 성신과 큰 확신으로 전하였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능력과 성신과 큰 확신으로 했다’(참고. 살전 1:5) 하는 것은 성신을 힘입어서 아주 능력 있고 확신 있게 전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나 스데반이나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충성스럽게 일한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이 다 성신이 오신 뒤에 능력과 지혜를 받아서 나아가 일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고, 성신의 힘으로 됩니다.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여쭈었을 때에 그들은 예수께 관해서 아는 것이 있었고 말할 것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수년간 따라다니면서 배웠고,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과 표적을 보았고, 교훈을 들었고,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보았고, 부활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만나는 사람들을 붙잡고 말하여 줄 것이 있었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활 후에 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분부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하셨습니다. 성신님이 오셔서 그들에게 충만하심으로 그들에게 능력을 주시고 일할 준비를 갖추게 하실 것입니다. 첫째로는 그들의 인격을 변화시켜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 좀더 우리 생활에 근리(近理)한 말로는 ‘친절’입니다. - 양선과 - 선량한 것 - 충성과 온유와 절제, 이 성신의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성신께서 믿는 사람에게 오시면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신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일이 됐든지 작은 일이 됐든지 그 일을 맡아서 할 만하게 갖추어 주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그 일을 지혜롭고 능력 있게 수행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앞장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오히려 자기의 무능을 깨닫고 성신의 인도를 받고 성신께서 능하게 하여 주심을 받고 나아가서 일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능력하고 자기가 무지한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잘 깨닫지 못할 때에는 성신을 끝까지 의지하고 성신께서 인도하실 때 비로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준비한 것이 없으니까 어느 시점에 가서 넘어지고 ,넘어지는 것이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타락은 했을지라도 사탄처럼 아주 완전히 타락한 것이 아니니까 사단과 같이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됐으면 이제 아무 소망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직 죄인일지라도 참으시고 회개하기를 기다리시는 것인데, 그럴 동안에는 사탄과 같이 그렇게 아주 악마적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을 선하게 지으셨으니까 사람에게 어떤 선한 것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의지해서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생각하고 성신을 의지하지 않고 기다리지 않고 그냥 나가서 할 때에 나중에는 넘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준비를 잘 시켜서 보내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닥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됨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짐

그러니까 예수께서 ‘너희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을 기다리라’ 하신 말씀이 거기에 뜻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무능과 무지를 깨닫고 반드시 우리 주님의 은혜를 기다려야 합니다.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신 대답을 보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라는 거대한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요 성신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됨으로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된다는 것을 또한 알게 됩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예수께서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메시야이신 것과 그가 하신 일과 그의 은혜를 확실하게 말하되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아니라 그들이 거의 이방인처럼 여기는 사마리아인에게도, 또 국경을 넘어서 많은 나라 많은 백성에게,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인에게도 전하는 것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과연 베드로 사도는 오순절에 예수께서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신 일과 무법한 자들의 손에 죽으셨으나 하나님께서 살리시고 오른손으로 높이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히신 사실을 이야기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그리스도로 세우신 것을 말하였습니다. 다른 사도들도 함께 서서 증인으로 말했습니다. 그 후 바울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여러 나라에 돌아다니면서 증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전할 때에 큰 결과가 나왔습니다. 거룩한 백성이 유대인 가운데에서도 나오고 이방인 가운데에서도 나왔습니다.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 사함과 죄 씻음을 받고 하나님께 돌아와서 하나님의 교훈을 부지런히 배우고,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자기 지역, 자기 민족 간뿐 아니라 외국 사람들 간에도 동일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고 사귐을 가지게 되고 사랑의 유대로 묶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입니다. 바벨탑을 쌓다가 그 높은 마음을 하나님께서 벌하심으로, 여태까지는 하나의 말을 썼지만 이제는 여러 나라의 말을 써서 이 사람이 저 사람에게 하는 말을 못 알아듣고, 이렇게 하여 말의 혼란이 생겼고 따라서 여러 나라 여러 민족으로 나뉘게 되었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 민족이 한 백성으로 통일되는 것을 보는 것은 이것이 역사상 처음입니다. 어느 시대에도 그렇게 된 일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그의 은혜가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끼쳐졌을 때 비로소 이 나라 사람이나 저 나라 사람이나 합해 가지고 그냥 한 나라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아주 참 놀랍고 기쁜 일을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서신서도 읽어 보면 우리가 그런 것을 배우게 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실 때에는 여러 나라로 갈려서 이 나라와 저 나라가 싸우라고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이 나라 사람은 이 말을 하고 저 나라 사람은 저 말을 하고 서로 그렇게 답답하게 살라고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세계가 다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서 한 백성으로 하나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서 살게 하실 목적으로 세상을 지으신 것입니다. 다만 사람이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따라서 사람 간에도 사랑이 아닌 미움이 생겨서 서로가 나뉘고 불화가 생겼습니다. 개인 간에도 그러고 또한 나라 간에도 불화가 생겨서 전쟁이 일어나고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처음에 지으실 때에 세우셨던 큰 뜻, 하나님의 경륜이 그냥 어디로 갔는지 없어져 버린 듯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시작하신 일을 그렇게 실패로 끝내시겠습니까? 실패로 끝내신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죄인들을 회개시켜서 그 사람들로 하나의 백성, 하나님의 백성, 거룩한 백성을 지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큰 능력을 행사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이와 같이 복음을 전파하게 하셔서 복음 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이나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원래의 뜻입니다. 그것을 지금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북쪽과 남쪽이 금년에는 혹시 통일을 이룰까?’ 하는 소망을 가지는데, 이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분열해서 싸우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그러나 동독과 서독이 통일을 이루었지만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아주 영구한 평안이, 영구한 평화가 동독과 서독에 왔습니까? 여러분, 신문이나 라디오나 잡지를 통해서 독일의 소식을 들어 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되지 않으면 참통일은 없는 것이고 참평안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국민들도 이것을 잘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북쪽과 남쪽이 아무리 합하고 한 정부를 만든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요원한 일이지마는 만일 만든다고 할지라도 소원 성취를 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 뜻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가 바라는 통일은 올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입니다. 벌써 2천 년 전에 시작하셨습니다. 오늘날까지 계속하시는 것입니다. 참으로 다행하고 다행스럽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 통일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천년이 가도 만년이 가도 그 은혜를 못 받는 것입니다. 통일 밖에 있는 것이고 통일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 우리가 들어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오래전에 호세아 선지자가 예언하기를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호 1:10) 하였습니다. 호세아는 북쪽 이스라엘이나 남쪽 유다나 다 멸망할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죄악이 우심(尤甚)해서 마침내는 망할 것이라는 것을 내다보고, 그러나 하나님께서 큰 긍휼 가운데에서 다시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계시로 깨닫고서 앞날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나라가 그렇게 회복될 때에는 그 나라의 백성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많이 일어나서 여기에 가담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때에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호세아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시기 8백여 년 전 오래전에 나서 이것을 예언했지만, 그것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이후에 그대로 이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이 곧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함

제자들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여쭈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상에 전파될 때에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될 것을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보면, 또 서신서를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고 전파될 때에 거룩한 백성이 각 곳에서 나온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 긴밀히 연결된 것을 볼 뿐 아니라 이 둘이 별개의 것이 아니고 같은 일인 것을 우리가 보게 됩니다.

사도행전 20:21에 보면, 바울이 자기는 바빠서 에베소에 들를 수 없으니까 지나가는 길에 밀레도에서 에베소에 있는 목사, .장로들을 다 초청하여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하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있을 때에 이렇게 했다’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을 전했다고 말했는데, 조금 더 내려가서 보면 “보라, 내가 너희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25절) 하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이나 딴 일이 아닌 것입니다. 같은 일입니다. 또 사도행전의 맨 마지막 장면에서 바울 사도가 로마에서 2년 동안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행 28:30-31)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법적으로 말하자면 죄수의 몸입니다. 그러나 상당한 자유를 가지고 오늘날로 말하자면 아마 가택 연금을 당한 정도나 되어 있는 상태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말하였습니다. 사도행전 맨 끝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데, 결국 그것이 같은 일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말한다는 것은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해 말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세우는 것이고, 주 예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가 빠진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텅 빌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아무리 많이 모여 있어도 모래알 같을 것이고 아무것도 안 될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다스리실 때에 하나님의 나라가 서게 되고, 그 능력과 아름다움을 나타내면서 전진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이 회복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따라서 바울 사도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이스라엘’(참고. 갈 6:16)이라고 하였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해 ‘충실히 이 규례를 지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 하고 복을 빌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로 말하자면 혈통으로는 아브라함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닌 갈라디아 교인들을 가리켜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이스라엘’ 하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인데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선지자로 하여금 예언하게 하신 바 이스라엘이 회복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이 회복되는 이스라엘 나라가 어떠한 나라인가를 살펴보고, 이전의 이스라엘 나라와 비교해 보면 새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우수한 나라요 복 있는 나라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가 하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는 일, 곧 하나님의 나라에서 가장 핵심적이요 중요한 일은 예수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게 되심으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 그런 만물보다 높이 되셨다는 사실이고, 이와 같이 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나셨지마는 다윗이 오히려 주(主)라고 부르는 그러한 자리에 오르신 것입니다. 도읍은 하늘의 예루살렘에 정하셨습니다. 땅 위에 예루살렘이 있지만 거기에 도읍을 정하신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 도읍을 정하셨습니다. 이 큰 사실을 오순절에 열두 사도들이 온 세상에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와 같이 높이심으로 하늘에 있는 자나 땅에 있는 자나 땅 아래 있는 자들이 모두 그의 발 앞에 무릎을 꿇도록 하셨습니다. 땅 위에서는 누구든지 예수의 권세를 인정하고 그를 주라고 시인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죽지 않으시고 영원히 다스리시므로 그의 나라가 영원합니다. 세상 나라는 일어났다가 망하고 흥했다가 쇠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오순절에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선포되신 이래 지금까지 2천여 년이 지났지만 그리스도는 여전히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고 살아 계셔서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를 의지하고 믿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고 계십니다. 이 나라는 다윗의 왕국과는 달리 그 영역이 더욱더 넓어져 갑니다. 다윗은 아무리 그때에 통일천하를 이루었다고 하지마는 우리나라 땅덩어리보다 작은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렸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역은 자꾸자꾸 땅 끝까지 이르러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역이 자꾸 넓어짐에 따라서 백성의 수도 불어나고 은혜의 정도도 더욱 풍성해집니다.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며 왕이신 그리스도

지난번에 생각한 대로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가 회개하는 마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그의 죄를 그 자리에서 사하여 주셨습니다. 다윗 왕국 때와는 달리 짐승을 가지고 성전의 제사장에게 가서 속죄제나 속건제를 드릴 필요가 없이 곧 그 자리에서 그 사람에게 사죄를 선언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유대 백성들이 사모하는 이전의 다윗 왕국 시절에 하나님의 백성이 누렸던 은혜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다스리시는 그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가 훨씬 더 풍성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한 가지 예가 될 것입니다. 하늘에 오르신 뒤에도 같은 방법으로 복음을 듣고 회개하고 믿는 자를 용서하시고 성신으로 씻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시고 세워 나가시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3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무슨 제물을 드리는 일이 없이 단순히 회개하고 믿음으로 거룩한 백성으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다른 복잡한 수속이 필요 없었습니다. 마음으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날로 즉시 거룩한 백성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바울 사도가 이방 땅 비시디아 안디옥에 가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그를 힘입어 죄 사함을 받고 그를 믿어서 의롭다 하심을 받으라고 전해서 믿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쳤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성전에서 멀리 떠나서 한 일입니다. 성전을 멀리 떠나 있으면서도 예루살렘에 찾아가지 않고 하늘에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사죄를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어서 살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높이 되시고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었을 때에, 이 회복된 이스라엘 나라의 새롭고도 은혜로운 점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께서 왕의 권세를 받으셨을 뿐 아니라 영원한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은 데에 있습니다. 한 몸에 왕이요 제사장 두 직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시편 110:1-2에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우편에 앉으신 주께 권능의 홀, 곧 왕권을 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시편 110편도 예언인데, 벌써 구약 시대에 오래전에 앞으로 있을 이스라엘의 왕에 대해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아론 계통의 제사장으로서 성막이나 성전에 속한 제사장이 아니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 임금을 쳐부수어 이기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맞아 축복하였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십분의 일을 드린 그 숭고한 멜기세덱 제사장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으로 명하셨습니다. 

다윗 왕국에서는 왕이 있고 제사장이 있고 각각 맡은 분야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백성에게 은혜를 입혀 주었는데, 이 회복된 나라에서는 그리스도 한 몸에 왕의 직분과 제사장 직분이 다 있게 되었습니다. 역사상 그런 일이 없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일이었고 이 사실에서 나오는 은혜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두고두고 큰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하나님의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계시의 중보자이실 뿐 아니라 제사장이시요 만유의 통치자이심을 가르칩니다.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 지극히 자비하신 대제사장으로서 친히 대속 제물(代贖 祭物)로 자신을 드리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셔서 회개와 믿음으로 깨끗하게 된 백성을 다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항상 자비로우신 대제사장으로 계시며 영원하신 왕으로 우리를 다스리시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거룩하며 의로우며 영원할 것입니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하심은 측량할 수가 없어서, 이스라엘이 무거운 죄로 인하여 나라가 망하게 되었을지라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 가운데 남은 자를 회개시키시고 그들을 회복시키시며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가 그 가운데에서 나오게 하시고 그를 두셔서 구원의 일을 다 수행하게 하시고 마침내 하나님의 우편에 앉히심으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회복하게 하셨사옵나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하심이 온 천지에 널리 전파됨이 마땅하옵나이다. 저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찬송하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요! 저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노래하고 찬미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와 능력을 온 땅에 알리시옵소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고 지금도 자비하신 대제사장으로 계시며 영원히 다스리시는 왕으로 계신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구원을 얻게 하신 저희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러한 큰 은혜를 먼저 입었사오니 저희가 얼마나 더 겸손히 생각해야 하겠사옵나이까? 저희의 마음이 낮아지고 저희의 눈이 낮아지게 하여 주시고 겸비한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마터면 저희가 멸망하고 캄캄한 가운데에서 바깥에서 울며 이를 갈 수밖에 없는 그러한 두려운 처지에 있지 않았사옵나이까? 이런 데서 저희를 구원하여 주셨사오니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두렵고 떨며 받게 하시고, 그 말씀을 따라서 저희가 진실하게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그의 다스리심에 순종과 충성을 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992년 5월 17일 주일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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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낙재 목사  |  4강. "다윗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마태복음 22:41-46

41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조금 전에 낭독한 말씀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에 관하여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 바리새인들은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아무도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전에 바리새인들이 묻는 말에 잘 대답해 주신 것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제자가 되어 배우기 위해 그 발아래 앉아서 물은 것이 아니고, 그를 믿지 않고 혹시 무슨 말을 잘못한다 싶으면 그것을 올무로 삼아서 넘어뜨리려고 물었던 것인데, 예수께서는 지혜롭게 대답하셔서 계시의 빛도 비추시면서 올무에는 걸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하던 바리새인들에게 이번에는 예수께서 이 질문을 던지시니까 그들이 한 말도 대답하지 못하고 이후로는 아무도 감히 더 질문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질문으로 무식한 자들의 입을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질문을 하신 것은 단순히 논적(論敵)을 역공하여 그 말문을 막으시는 그런 전술적 목적만 있으신 것이 아니고, 바리새인이 됐든지 옆에 있는 제자들이 됐든지 일반 백성이 됐든지 누구든지 마땅히 그리스도에 관해 알아야 할 것을 알도록, 또 알기 위해 생각하도록 그 생각의 방향을 정하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과연 이 질문은 그리스도를 아는 데 큰 빛을 던져 주는 말씀입니다. 질문을 하시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지 않으셨지마는 이후에 된 일과 과거의 예언의 말씀을 종합하여 생각할 때에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그리스도에 관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지 바르게 알도록 하는 말씀입니다. 또 이 말씀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셨는가? 일반 이스라엘 사람들과는 달리 친히 스스로를 어떻게 알고 계셨는가?’ 하는 것을 엿보게 하는 말씀도 됩니다.

후에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6-11). 주님 자신도 부활 후에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고 말씀하셔서 그리스도가 영광스럽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죽으시기 전에도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하려느냐?”(요 6:62). 잘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땅에 속한 뭇사람 중의 하나와 같이 취급하려는 이런 유대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하려느냐?’ 이렇게 하셔서 승천하실 것을 미리 아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하셔서 죽으실 죽음이 부끄러운 죽음이 아니고 많은 열매를 맺는 영광스러운 죽음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의 심정과 앞날을 어떻게 내다보셨는지를 말해 줍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주께서는 땅에 계실 때에도 하나님의 보좌의 우편에 높이 앉으실 것을 아시고 십자가와 그 부끄러움을 참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심

예수께서는 당신 스스로에 대한 기독론이 확고히 서 있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아셨고, 당신 스스로가 그리스도로서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 것과 장차 어떻게 될 것에 대해서 다른 사람과 같이 모르고 계시다가 어쩌다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셨다고 도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모든 말씀을 볼 때에는 주님께서는 땅에 계실 때에도 확고히 자신이 누구이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정하신 길이 무엇이고, 그 맨 마지막은 영광이라 하는 이런 사실에 대해서 잘 아시고서 그 길을 걸어가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에 관해 명확히 계시하시고 가르치시기 위해 시편 110편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시편 110편을 메시야, 곧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으로 인정하셨습니다.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신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마 22:43-44). 시편 110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한 왕을 하나님의 우편에 높이 세우시고 원수들을 그 발아래 굴복케 하시며, 그의 백성들은 원수를 굴복시키고 그 가운데서 다스리시는 왕을 위해 즐거이 헌신하므로 일종의 군대로 그려 놓았습니다. 거룩한 옷, 곧 제사장의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는 백성으로 그려 놓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왕은 세상의 군대와는 다른 거룩한 싸움을 하는 백성들, 거룩한 싸움을 하는 제사장들을 거느린 왕입니다. 그래서 결국 알고 보면 왕 자신이 세상 왕들처럼 군대를 의지하고 총칼로 다스리는 그런 왕이 아니시고 제사장을 겸한 아주 특이한 왕이신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사장이라도 레위 자손 중 아론 계통의 제사장이 아니고, 옛날 여러 임금을 쳐부수고 이기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서 축복했던 살렘 왕인 동시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입니다.

시편 110편은 이런 높고 거룩하고 신비스러운 제사장 - 왕을 예언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이 높으신 왕이 그리스도라. 그리스도가 장차 이같이 높아지시리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이 그리스도요 이같이 높이 되실 것이라고 그렇게 명백하게 말씀하시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일단 접어 두고라도 이 예언된 특이한 높은 왕이 그리스도라 하는 것, 그리스도가 그렇게 높으신 분이요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을 그들 앞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오순절에 큰 은혜와 능력을 나타내신 이후에는 모든 교회에서 이 시편 110편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예언한 것을 다 인정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에 행한 대연설의 종결 부분에 가서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4-36) 하는 말씀으로 시편 110편에서 예언하던 그 사실이 지금 이루어졌다 하고서 유대인들 앞에 선포한 것입니다.

또 바울 사도가 부활을 논하면서 이 시편 110편을 인용하였습니다.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5-26). 시편 110편의 내용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슨 일을 행하고 계시고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것을 가르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110편의 예언대로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왕 노릇 하시고, 큰 능력으로 원수들을 굴복시키시며, 마침내는 죽음을 폐하시고 자기의 백성을 부활시키실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 시편 110편의 내용을 그대로 가져다가 써서 가르친 것입니다. 히브리서도 예수께서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3) 하고, 1:13에 가서 이 시편 110편의 예언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관한 예언이라고 인용하였습니다.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하나님께서 아무 천사에게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고 가르칩니다.

시편 110편에는 메시야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110편이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이라는 근거로 삼을 ‘그 그리스도’란 말은 거기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러면 다윗이 성신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고 말씀하시면서 어떻게 그렇게 하였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읽은 말씀에는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하였는데, 구약 성경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셨다’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셨다’고 하였을 때에 그 ‘내 주’란 다윗이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내 주’라고 말한 것이다 하고 예수께서는 지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셨다’ 하고 말했는데, 만일 그리스도가 다윗의 주라면 어떻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는 것이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이때에 바리새인들은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못했습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상대하여 변론을 하는 입장이니까 예수님이 그들의 논적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틈만 있으면 어떤 반론을 제기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무슨 말로 대답할 말이 없으니까 잠잠한 것이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운데 어떤 허점만 보이면 그것을 가지고 ‘왜 그런 질문을 하는가?’ 하고 틀림없이 물었을 것입니다. 첫째로, ‘이 시편이 다윗의 시인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고 묻지도 않았고, 이 시편이 다윗이 쓴 시(詩)인 것을 그들은 부인하지도 않았습니다. 잠잠히 그대로 들었습니다. 다윗이 성신의 감동으로 말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그대로 인정했습니다. 그다음, 다윗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내 주’라고 하였다는 것을 그들은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그것을 굳게 믿고 이 시편을 그렇게 이해하였는지 우리가 확실히 모르지만, 이 시편이 메시야 시편인 것을 일반적으로 다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부인할 특별한 이유가 없었습니다.

다만 땅 위의 예루살렘에 도읍을 정하고 다윗 왕국과 같은 나라를 회복하고 다스릴 그런 다윗의 후손을 간절히 바라는 저들로서는 하나님의 우편에 좌정하시고 거룩한 백성을 다스리실 초연하고 거룩하신 왕과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를 어떻게 조화시킬 지혜가 그들에게는 없었던 것이고, 이 두 줄기의 계시에서 하나의 조화 있는 그리스도의 상을 그들의 마음에 어떻게 형성할 수가 없었을 뿐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바라고 기다린다고 하였지만 어떠한 그리스도를 기다릴지 그들은 막연했던 것입니다. ‘너희가 어떠한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바라느냐?’ 하고 물어보면 똑똑히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무지하였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지만 전혀 성경의 빛을 받고 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성신께서 성경의 말씀을 쓰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고 하나님을 아는 빛을 주지 않으시면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지 못하고 그냥 닫힌 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유대교의 경전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못 되는 것입니다. 인간 종교의 경전에 그치고 하나님의 말씀의 효력을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성경을 사랑하고 그것을 부지런히 연구하고 아끼고 보존하였습니까? 그래도 도무지 성경이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로 그들은 그것을 그냥 유대교의 경전으로 붙들고 나온 것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큰 귀감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세대든지 어떤 시대든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자기들의 종교 경전으로만 붙들고 있으면 거기서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하고 생명을 얻지 못하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다윗의 주이신 그리스도

다윗에게서 메시야의 예언이 나오게 되는 경위를 살펴보면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궤를 위해서 성전을 지을 소원을 나단 선지자에게 말한 뒤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언약이 있습니다.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位)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삼하 7:11 하-16). 이 언약은 다윗의 후손들, 솔로몬, 르호보암, 아비얌, 아사, 여호사밧, 이 유다의 열왕들에게서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유다 나라는 백성의 죄와 왕의 죄가 어우러져서 징계를 받으면서도 아주 망하지는 않고 여러 번 여러 번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은 왕이 되었을 때에 아합의 딸이 아내가 되었으므로 다윗의 길로 행치 않고 아합 집을 본받아서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악을 행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겼고, 따라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고 무시하고 짓밟고 불의를 행하였습니다. 그 길을 이 여호람이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를 가리켜서 역사를 기록한 예언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저와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왕하 8:19). 하나님께서 다윗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시겠다고 허락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악한 왕의 시대에도 나라를 멸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왕과 백성의 죄가 너무 무거워서 마침내 여호야김과 시드기야 때에 나라는 망하고, 왕과 백성이 한목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습니다. 그 후 형편이 조금 펴이는 때도 있었지마는 태평세월은 한번도 없었고 오히려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이런 세계 제국들에게 항상 눌려 지냈고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처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하신 바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는 이 약속은 다윗의 자손들의 죄 때문에 도무지 이루어질 수가 없었습니다. 죄 있는 인생이 그 왕위에 있는 한 나라가 영원히 보존되고 영원히 견고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윗의 자손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나와서 그 왕위에 오른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고는 왕위가 견고히 되지 못하고 또 나라가 영구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역사가 증명한 바인데, 다윗은 이 후대의 일을 다 경험하지는 못하였을지라도 성신의 감동으로 자기의 자손 가운데에 거룩하시고 초연하신 한 분이 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실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사람의 지혜로 어떻게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신께서 특별히 먼 앞날을 다윗에게 보여 주심으로써 앞에 될 일을 그가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0편을 쓴 것입니다. 성신에 감동하여 이 시편을 쓴 것입니다. 다윗이 이 시에서 ‘내 주’라고 하였는데, 자기의 자손일지라도 그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고 모든 나라를 쳐서 이기시고 거룩하고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분인 것을 알고 하나님과 동등하신 것을 알고 주(主)라고 불렀습니다. 분명히 자기의 자손 가운데에 나실 그분이시지만, 그분은 단순히 자기의 자손만이 아니시고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다 하는 것을 깨닫고, 자기의 자손인데도 불구하고 그가 그리스도인 것을 알고 ‘내 주’라 부르면서 이 시편을 쓴 것입니다. ‘주’라는 말이 종이 주인에게 쓰는 말이고, 또 아내가 남편에게도 사용하고, 특별히 어떤 관계가 맺어지지 않았을지라도 높이 존경할 만한 사람에게 쓰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하나님께 쓰는 존칭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다윗 자신이 그 앞에 설 때에 미천한 인간으로 서게 되는 높으시고 거룩하신 분을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결국 사람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 그런 신성의 그리스도가 자기의 후손으로 태어나셔서 거룩하고 영원한 나라를 세우실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예언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그리스도를 주시고 이러한 그리스도를 세우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일이란 실로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런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영접한다는 것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요, 실로 겸손하지 않고는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세상에 오셨을 때에는 그 큰 사명에 맞게 일을 하셨고, 하신 일들은 그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리스도임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걷고,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셨습니다. 그 교훈은 권세 있는 자의 교훈이었고,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보면 누구든지 믿을 만하였습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이유

그러나 기이하게도 많은 사람이 믿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때때로 예수께 와서는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당신이 범인(凡人)이 아니고 하나님께로 와서 가르치고 무슨 행사를 한다고 하는데 과연 하나님에게서 왔는지 그 증거를 내시오.’ 자기들이 내놓은 어떤 조건에 맞으면 그리스도로 인정해 주겠다는 태도입니다. 자기들이 지금 얼마나 타락한 처지에 있고 어둠 가운데 있으며 무지하고 어리석음이 가득한 자들인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들이 내세우는 어떤 이치에 맞으면 인정해 주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 이성의 심판대 앞에 어떠한 증거라도 내놓기를 거절하셨습니다. 증거는 이미 충분히 믿을 만하게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일을 하시기 위해서 믿을 만한 증거를 넉넉히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이 못 믿는 것은 증거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의 악함을 회개하기가 싫기 때문입니다. 증거가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못 믿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증거가 없어서 하나 더 있어야 되겠다고? 그것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의 마음이 악하여서 그것을 회개하기 싫어하고, 회개하는 그 부끄러움을 자기가 감당하지 않으려고 숨는 것입니다. 빛에서 도망가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되고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바라고 거기에 의지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무덤을 지키던 군병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을 자기들의 눈으로 보고도, 바로 곁에서 보고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윗사람들에게 가서 보고를 했을 때, 거짓말을 하라고 시키니까 그냥 거짓말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신 것을 부인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햇빛과 같은 증거가 있는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그냥 죄 가운데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하시지만, 자기가 심판대를 딱 차려 놓고 ‘어디 그리스도라면 증거를 내보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 하는 이런 오만한 자에게는 아무것도 주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해 확고한 지식이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자처하였지마는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에 그를 알아볼 만한 판단력이 없었습니다. 선생의 자리에 있으면서 예수께서 자기들과 다르고 자기들을 인정해 주시지 않는 것을 발견했을 때에 그들은 돌이켜서 예수를 시험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에 올무를 놓아서 거기에 걸리면 예수를 넘어뜨리려고 했습니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고 자기들의 제자를 헤롯 당원과 함께 보내어 이렇게 물었습니다. 백성 중에는 로마의 통치를 결사반대하고, 그래서 세금을 바치는 자까지 해치려고 하는 열심당원이라는 과격분자가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께서 세금을 바치라고 하시면 이 사람들에게 걸릴 것이고, 바치지 말라고 하시면 이 헤롯 당원은 로마에 아부하고 그 권력에 의지해서 사는 사람들이니까 그들이 로마에 고자질을 해서 예수님이 거기에 걸리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간악한 계교가 그들 속에 있어서 가서 그런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넘어뜨려도 아주 완전히 거꾸러뜨리고 다시는 그 사회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게, 일어서지 못하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팔레스타인을 로마 가이사의 통치하에 두셨습니다. 로마 화폐가 거기서 사용되는 것이 그 증거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찌 되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가이사의 통치 안에 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이사의 권한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기의 백성이나 식민지 백성에게 무한대의 권세를 언제까지 행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상의 통치자가 그 통치의 한계를 넘어서 절대 권력을 행사하려고 하면 그것은 과람(過濫)한 것입니다. 로마 황제가 자기가 사람이 되어서 ‘모든 백성은 나를 신으로 섬겨라’ 하는 포고령을 내린다면 이런 것은 과람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황제로 오래 두지 않으십니다. 갈아 치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고 또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말에서 올무를 잡지 못하고 그냥 떠났습니다.

그 후 사두개인들이 부활 사상을 조롱하려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접근한 태도를 쭉 보면 바리새인처럼 그렇게 올무를 놓아서 넘어뜨리려고 했다기보다는 부활 사상을 조롱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자기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데 필시 이 예수는 그것을 믿을 것이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 하고 한번 조롱해 보려고 여러분이 다 아시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입을 아주 능력 있게 막으셨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능력도 성경도 알지 못하므로 크게 오해하였다’ 하시고서 ‘부활할 때에는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고, 부활한 사람들은 천사와 같은 것이다’ 하셨습니다. 사람이 모든 면에서 천사와 같다는 말이 아닙니다. 천사는 몸이 없고 영적인 존재이지마는 사람은 다 몸을 가지고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할 때에는 혼인하지 않으며, 장가가거나 시집가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천사와 같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전혀 내세에 대한 지식이 없는 이 사두개인들로서는 그만 그 말을 듣고 다시 더 무슨 질문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 이렇게 사두개인들의 입을 막으셨다는 것을 이 바리새인들이 듣고서는 또다시 그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시험하여 물었습니다. ‘계명 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 자기들이 율법에 능하다고 생각해서 예수님과 한번 변론을 하려는 심산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7-40) 하셨습니다. 계명들은 수가 많을지라도 살아 계신 한 하나님에게서 나온 계명이기 때문에 서로 연관이 있고 큰 계명을 중심으로 통일되었다는 것을 이 간단한 답변으로써 잘 보여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계명들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따라서 계명들을 낱낱의 흩어진 것으로 이해하고,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가 하고 비교하는 일에 열심이었는데, 예수님의 이 통일되고 우수한 율법관 앞에서 어떻게 시비를 걸 수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시대에 꼭 필요했던 메시야관, 기독론이 없었고, 그러면서도 오만하게 표적을 요구하고 예수께 말의 올무를 놓고 시험을 하여 왔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숭고한 기독론을 내놓으시고 대답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 중 한 말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날부터 감히 묻는 자도 없었습니다. 시험하여 보려는 자의 말문을 그렇게 해서 막아 버리셨습니다. 그들의 오만을 꺾으시고 ‘그리스도가 얼마나 높으신 분인가?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가?’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볼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데도 다윗의 자손으로 태어나셨다면 그리스도의 겸손은 어떤 것이며,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것인가를 알고 겸손하게 믿든지, 못 믿겠거든 놀라고 망하라!’ 하고서 이 질문을 그들에게 던지신 것입니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오래 땅 위에서 살면서 죄를 짓고 살 때에는 얼마나 그 사람이 타락해지고 악해지고 어두워지고 미련하게 되는 것인지요! 저희가 저희 자신들을 돌아볼 때에 이런 사실을 스스로 알지 못하나, 옛날 바리새인들이 행한 사적을 살펴볼 때에 과연 사람이 얼마나 오만하게 되고 얼마나 어두우면서도 무지한 가운데 미련하게 되는지, 진리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빛 앞에서 도무지 깨달음이 없으면서 미련한 짓을 행하고 오만한 짓을 행하고 심지어 그리스도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그런 무서운 행위를 행하게 되는지를 저희가 알게 되옵나이다.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저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성신님께서 저희의 마음에 그리스도를 아는 빛을 비춰 주시고,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높으시고 거룩하신 분인가를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도 하나님의 우편에 살아 계시며 온 땅 위에 권세와 능력을 행사하시고 겸손히 주를 의지하는 자에게는 큰 은혜를 베푸시는 거룩하신 분인 것을 저희로 하여금 더욱더 알고 의지하고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저희의 마음속에 더욱 비추시고 저희의 마음속에 두셔서 저희가 그 빛에 의해 더욱 겸손하게 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게 하여 주시고, 저희가 무지를 벗어 버리고 밝은 지식 가운데에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992년 1월 12일 주일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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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낙재 목사  |  5강.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

로마서 10:9-17

9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1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오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6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여기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지 않고 구원을 받는가?’ 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9-10절).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이 나의 주가 되십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이 예수님을 높이 생각해서 자기더러 ‘오라 하면 오고, 가라 하면 가고, 이것을 하라 하면 하겠다’ 하는 고백을 하고 예수님을 그런 분으로 알았고, 또 예수께서 그 계신 자리에서 자기 하인의 중풍병을 물러가라 하시면 그 병이 나을 줄로 믿었습니다. 중풍병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물러갈 것이라고 이 백부장은 말했습니다. 이 가버나움의 백부장처럼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하고 주(主)시라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에 믿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믿기 때문에 입으로 주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째로, 사람이 구원을 얻으려면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이 나의 주가 되십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그 마음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믿기 때문에 입으로 예수님을 주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면 그를 하늘에 올리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히셔서 만물 위에 높이시고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것을 모두 그 발아래 들어가게 하신 것인데, 지금 여기서는 그 처음만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심으로 높이기 시작하신 후에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셔서 만물을 다 다스리도록 하신 그 모든 일들은 예수님의 부활 뒤에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는다고 할 때에는 이 모든 것을 포함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활시키시고 그다음에는 전연 모른다든지 예수님을 잊어버렸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고, 부활시키신 뒤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신 것을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의 사실로 다 연결시켜서 포함하여 이 세상에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것은 맨 처음의 사실만을 들어서 말한 것뿐입니다. 그 뒤에 있는 모든 것이 거기에 따라오고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리셨다는 것을 고백할 때에는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다 포함하여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신 일을 다 믿기 때문에 입으로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시다’ 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믿는 사람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떨어져서 멸망하지 않고, 이 사람은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셋째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13절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여기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구약 시대로부터 예배하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또한 특별히 불러서 무엇을 아뢰고 간구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창세기 4:26에 아담의 아들 셋에 대하여 말하기를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했습니다. 또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벧엘과 아이 사이에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했습니다. 신약에서도 이 부른다는 말이 예배하는 것, 간구하는 것을 뜻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다메섹으로 갈 때에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잡으러 갔다(참고 행 9:14)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하고 예배하는 사람들을 잡으러 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하게 되는 것은 이제는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구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똑같은 행위로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렇게 높이 생각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생각하고, 다윗처럼 그리스도를 주시라고 부르고 경배하든지 기도하든지 하는 그 사람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바른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알고 높이고 그에게 경배하는 것은 큰 특권입니다. 아무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 구원을 받는 것은 어떤 일이 있었기에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까? 믿음이 있게 된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일이 있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다음 말씀을 보면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오.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오.”(14-15절 상)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믿음이 없이 예수께 경배할 수가 없는 것이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지 않고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고 여기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오.’ 복음 전파자가 전하는 복음을 듣고서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는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와 목사와 교사를 주께서 말씀을 맡아서 전하는 자로 세우신 자들이라고 기록했는데, 이런 사람들의 말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이 로마서 10:14의 말씀은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는 자들이 믿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마치 베드로, 요한, 마태, 안드레, 바돌로매, 또는 막달라 마리아,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듯이, 오늘날도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서 믿게 되는 것이라고 지금 바울 사도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을 좀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예수께 대한 소문만 듣고 어떻게 믿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직접 보고 듣는 일이 없이 누가 전하는 소문만 듣고서 어떻게 그냥 믿을 수 있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이 14절의 말씀은 확실히 만나보고서야 믿는 것이 아니냐 하는 뜻입니다.

누가 되었든지 자기가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부르고 일생을 드리는 일을 하면서 그냥 한 번 주님이라고 부르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때에는 내 일평생 언제라도 변함없이 항상 주님이라고 부르고 따르겠다는 뜻으로 부르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사람을 구원하시는 것이지, ‘아,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면 구원을 얻는다!’ 하면서 길 가다가 장난삼아서 한번 ‘예수님은 나의 주님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고, 여기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높이 주님으로 만민 위에 세우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평생 언제든지 어디로 가든지 변함없이 살아서도 믿고, 죽은 후에라도 예수는 나의 주님이시다 하고 확고부동하게 영원토록 믿겠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일을 결정하면서 그냥 쉽게 사람 말만 듣고 하겠습니까? 분명히 주님께서 지금 말씀하신다 하는 것을 알고야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큰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첫째,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오.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오.’ 곧 오늘날은 베드로와 요한 때에 하시듯이, 그러니까 거금 2천 년 전에 하시듯이 예수께서 몸으로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전파자를 사신으로 보내시는 것을 말합니다. 전파자를 세우셔서 예수님의 대사(大使)로 예수님의 사신(使臣)으로 보내시는 것인데, 첫째는 주께서 전파자를 보내시면 그는 안 갈 수가 없는 것이고, 가서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 9:16) 하였고, 또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고전 9:17) 하였습니다. 둘째는 전파자가 복음을 전하면 이것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전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영광과 권위가 거기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자나 말씀을 듣는 자가 다시금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소요리문답 90문의 답에 ‘하나님의 말씀이 구원을 위하여 효력 있게 되려면 우리는 부지런함과 마음의 준비와 기도로써 나아가야 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 마음에 간직하며, 우리의 생활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하고 가르칩니다. 첫째는 그 말씀을 들으러 갈 때에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지런해야 하고, 그냥 자기 할 일 다 하고 생각 없이 있다가 시간이 되었으니까 간다 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의 준비도 있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가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간다’ 하는 마음으로 가야 합니다. 요한이나 베드로가 예수님을 찾아갈 때 그냥 보통 마음으로 갔습니까?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믿고 그에게 갔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있어서 갔습니다. 자기의 직업도 다 버리고 간 사람들이 아닙니까? 또한 기도로써 나아가야 합니다. 또 들을 때에는 믿음과 사랑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들은 뒤에도 또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한번 들었으니 좋다 하고 말 것이 아니고,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말씀을 들었는데 그냥 듣고서 잊어버리겠습니까? 마음에 간직하며 우리의 생활에서 그것을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소요리문답을 작성한 옛날 믿음의 선진들이 이런 것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남긴 것을 우리는 참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용케 그때에 태어나서 예수님을 보고 직접 들었는가?’ 하고 우리가 옛날 베드로, 요한, 막달라 마리아만 부러워할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도 겸손한 마음이 있으면 영광의 주께 가까이 갈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그런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널리 복음이 전파되게 하시고 보낼 자들을 세우셔서 보내심으로 이와 같이 사람들이 영광의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그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다 마련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의 주의 말씀을 들으러 하늘에 올라가야 하는 것도 아니고 멀리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큰 수속이 필요가 없고 복음을 전하는 자의 말을 듣고 마음으로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역사(歷史)와 거대한 내용

우리가 복음에서 그리스도를 배워 그를 믿고 의지하면 흑암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믿을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통치는 오늘날도 이 땅 위에 우리에게 다 미쳐서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우리의 주시라’ 하고 믿을 때에, 진정으로 마음으로 확고히 그것을 믿을 때에 우리는 어둠의 권세 아래 있다가, 여태까지 하나님을 떠나서 마귀의 권세 아래 있다가 이제 하나님의 나라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골로새서 1:13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서 입으로 시인하면 그처럼 큰 구원을 받는 것이니까 매우 수속이 간단합니다. 하늘에 올라갈 것도 없고, 예수님을 만나러 수천 리를 갈 것도 없고, 그냥 하나님께서 전파하여 주시는 그 말씀을 듣고 ‘아, 과연 그렇구나!’ 하고 ‘이제는 내가 이전과 같이 살지 않고 확고히 주님을 믿고 살겠다’ 하고 작정하고 나가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이렇게 간단하지만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데에는 그냥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쉽게 쉽게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마 13:44). 천국은 이런 것이라고 주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밭에 감춰진 것의 가치를 깨닫고 자기의 전 재산도 아까워하지 않을 만큼 그것을 소유할 때까지 노력하는 것이 그것이 천국입니다. 자기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그냥 다 가진 채로 천국도 가지겠다고 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소유를 다 버려야만 나의 제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이라는 것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 훌륭하다는 모든 것도 지푸라기와 같이 다 버리고 그것을 취할 만큼 그렇게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희생을 하지 않는 사람은 도무지 천국을 소유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은 역사가 있습니다. 가령 마태복음의 처음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하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마태가 유대인을 주로 목표로 하고 썼지만, 유대인만이 아니고 온 세상에 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고 마태복음을 쓴 것입니다. 그런데 맨 처음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하고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대(世代)의 계통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에 그로부터 2천 년이나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과 또 천년이나 올라가서 다윗에게 하신 언약하에서 그 언약이 이루어진 역사의 결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마태가 예수를 전할 때에는 갑자기 ‘하나님의 아들이 여기에 이렇게 태어나셨다. 놀라운 것을 전한다’ 하고 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예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다윗의 자손이다’ 하는 말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한 번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 전 세계의 역사를 다 진행시키시고 하나님의 경륜을 그 가운데서 이루어 나오신 것입니다. 그런 결과로, 그런 터 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나오시게 된 것이고, 그것을 마태는 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9-10).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여러 세대에 걸쳐서 세상만사를 경륜하시려고 미리 정하신 바 그 비밀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 사람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 홀로 그것을 정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 경륜은 비밀입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비밀입니다. 이 비밀이 이제 나타나는 것이고,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에서 통일되게 하려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내용이 장구한 역사를 포함하고 있고, 전 우주가 통일되고 새로워지는 거대한 내용을 담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교회가 통일을 원하고 교회의 통일, 하나님의 백성의 통일을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여 가르치고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여 어떻게든지 통일을 이루어야 할 것을 말하지만 주의를 해야 합니다. 겨우 우리 민족의 남북통일을 위해서 힘쓰라고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줄 아십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들이 북쪽과 남쪽의 통일을 위해 무슨 기도회로 모이고 그런 것을 위해 큰일을 한 것같이 생각하고 한다면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북쪽에 있는 그 교회의 대표들이 누군지 알고 그러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정당한 신앙이 있나 없나 알아보지도 않고, 공산주의하에서 공산주의의 그릇된 사상들을 포함하고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알아보지도 않고, 그 관(官)에서 세운 그런 교회 지도자들을 초청하고 그런 사람들과 함께 통일을 한다고 합니까?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통일을 이루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인가?’ 하는 것을 찾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통일은 거대한 통일이고 완전한 통일이고 거룩한 통일입니다. 거기에 죄를 내함(內含)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아주 순전히 거룩한 나라의 통일을 말하는 것이지, 겨우 땅에서 현세에서 어떤 나라가 두 동강이 났다가 합해지는 것을 위해 교회가 힘쓰라고 하신 줄 아십니까? 이 세상의 교회가 진리에서 떠나 전혀 진리를 알지 못하는 가운데 그런 헛된 데에다가 힘을 쓰고 거짓된 것을 참것으로 알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이 복음은 이렇게 그 내용이 장구한 역사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고, 전 우주가 통일되고 새로워지는 거대한 내용을 담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것을 알고 믿고 우리가 받아서 그 가운데 산다는 것은 쉽지만은 않습니다. 마음의 준비가 없이 교회에 나와 있으면 그대로 그냥 다 알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십 년을 다녔어도 어렵고 무슨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면 그동안에 무엇에 마음을 썼는가 하고 반성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느니라’ 하는 그 말씀의 뜻이 무언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셨으니까 우리가 그를 믿으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서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고, 그러면 이제는 죄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따르며 살아야 할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일이 없고서는 결코 우리가 주를 믿는다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때에는 그런 것이 다 함께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를 배반하는 자가 됩니다. 일찍이 가룟 유다도 예수를 주님으로 부르고 한동안 오래 따른 사람입니다. 아주 충실하게 따른 사람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최후의 날까지도 그 친구들이 몰랐습니다. 아주 충실한 제자라고 생각했고, 돈까지 맡아서 회계를 보는데 예수님이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까 가룟 유다가 나갔는데 다른 제자들은 ‘뭘 구제하려고 나가는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전혀 의심을 안 했습니다. 이렇게 외형적으로는 다 같이 따랐고 입으로 고백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그렇게 딴 데로 가는 것을 가지고 진정으로 고백을 했다고 볼 수 없고, 그 고백이 진정한 고백이려면 끝까지 언제든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바로 알고, 그리고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원래 아무 죄도 없고 하나님 앞에 아무 흠이 없는 사람 같으면 특별히 자기를 부인할 것도 없겠지마는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산 사람이고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들을 많이 행하고 산 사람들이고 그런 습관이 밴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다 부인하고 ‘이것은 안 된다. 안 되겠다’ 하고 이제부터는 자기에게 주신 십자가, 하나님의 뜻, 마땅히 가지 않으면 안 될 그 길을 자기가 배우고 찾아서 그 길로 날마다 가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주님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없이 그냥 십 년 예배당만 다니면 그것으로 된 것같이 생각하면 안 됩니다. 분명히 주님을 알고 배우고 철저히 알아서 다른 사람들이 그릇되게 말하면 ‘아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분이시다’ 하고 말할 수 있어야 그 사람이 배교하는 물결에 안 휩쓸려가고 자기의 길을 똑바로 갈 수 있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제는 살았으니 자기의 일을 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실로 주를 따르는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맨 마지막 말씀은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믿는 길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가졌다가 버리지 않고 항상 믿음을 유지하고 끝까지 믿고 나아가는 그런 길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그리스도의 은혜는 죄 사함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배우는 것은 죄 사함만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서 벗어나고 성신을 좇아서 능력 있게 거룩하게 죄를 이기고 사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고, 또 자기 개인이 죄를 이기고 자유롭게 사는 것만 알면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것을 믿고 바라고 살아야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항상 생각이 개인주의적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아 이제 구원을 얻었으면 됐다’ 하고 이상 더 별로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항상 개인주의적으로 해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려면 개인주의적인 생각은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때에 하나님의 많은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그 백성이 함께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고 살아가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자기만 생각하고 또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교회를 이루어서 살아가도록 하셨는데 교회를 이루어서 살아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고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아주 참 숭고한 직분을 주셨는데,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버리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지체 노릇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 손이 귀한 지체이지만 손 하나만 있어 가지고 뭘 합니까? 손이 몸에 붙어 있어야 몸에서 피도 받고 영양도 받아서 손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 손이 잘려 버리면 이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몸에 붙어야 합니다. 몸에 붙어야 자기도 살고 자기가 몸을 위해서 무엇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셨을 때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도록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자기 혼자의 구원만 생각하고 남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으면 도저히 주님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태도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것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바라고 살아야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태도가 됩니다. 그것을 다 무시하고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서 구원을 얻었다’ 하는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고 항상 그대로만 하고, 자기의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구원을 받고서 자기의 일만 자꾸 하고 거기다가는 마음을 안 쓰면 언젠가는 떨어지는 것입니다. 결코 오래 못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나를 따르려면 반드시 자기를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는데도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안 지면서 주님을 따르려고 합니까? 자기를 버리지 않고 그냥 따르려고 합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얼마는 갈지는 몰라도 나중에는 반드시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계속 은혜를 주시고 믿음을 주시지 않으시면 자기의 힘으로 끝까지 예수를 못 믿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결과로 드러납니다. 사회생활에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가르치는 모든 교훈에 대해서 정신을 차리고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고 부지런히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받아야지, 베드로 사도의 말씀과 같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야만 구원을 제대로 받는 것이지 ‘사함을 받았으니까 이제는 구원에 대해서는 염려할 것이 없다. 이제는 나의 일을 하고, 나의 명예를 위해서,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을 위해 염려하면 되겠다’ 하는 생각을 하십니까? 그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옛날의 생활에서 완전히 돌이켜서 180도 돌려서 하나님을 향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원래 사람을 지으실 때에 자기를 위해 살라고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고 사람을 지으셨으니까 거기에서 비꾸러져 간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늘 사귀면서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할 텐데, 비꾸러져서 하나님을 떠나니까 온갖 더러운 일, 추악한 일들을 행하는 죄를 행하고 산 것입니다. 이제는 그런 것을 다 청산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배워서 그것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이 많은 것입니다. 마음을 써야 할 일이 많습니다. 배워야 할 것이 많습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다 집어치우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배워서 그것을 행하는 것이 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태도로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이 있지만 그 귀중한 일이 있지만 그것은 놓아두고 ‘나는 나의 일을 한다’ 그렇게 별도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의 일이 나의 일이다. 아버지께서 경영하시는 일, 큰일이 결국 나의 일이다. 나의 일이란 다른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일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고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아주 부지런히 배워야 합니다. 겨우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는가 하는 것만 생각하고, 내 영혼을 구원 얻는 것을 배웠으니까 이제는 그것은 놓아두고, 또 사람이니까 세상에서 살아야 하고 명예도 얻어야 하고 살 만큼 집안도 세워야 하고, 그런 것을 생각해서 ‘이제 내 일을 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것은 벌써 빗나가는 것입니다. 믿고서 그 허구한 많은 시간을 어디다 썼는가, 나의 정력을 어디다 썼는가 하는 것을 다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다 복음을 전하러 나가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각각 은혜를 주신 대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거기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 가는 것인가, 어떻게 이제는 구원을 얻은 백성으로서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을 부지런히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자연히 그리스도가 누구시냐 하는 것을 더 알아야 하고, 그래서 그리스도와 나의 관계를 아주 분명하게 정립해야 합니다.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그것을 기쁨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세대를 통하여 이루시려고 미리 정하신 바 하나님의 경륜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쉬운 말만 아니고 어려운 말도 배우려고 힘써야 합니다. 귀에 들어오는 쉬운 말만 듣고, 그렇지 못한 어려운 말은 그냥 ‘귀찮다. 왜 듣기 좋은 무슨 예화나 들지, 그렇잖아도 엿새 동안 일하느라 고단한데 교회에 오면 자꾸 그렇게 어려운 말만 하는가?’ 하면서 그런 것이 귀찮다고 안 들으려고 하면 그리스도를 배울 때가 없을 것입니다. 언제 배웁니까? 그리스도는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한두 시간만 배우고 하루 이틀만 배우면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베드로 사도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는 말씀을 했겠습니까? 베드로 사도가 글을 썼을 때에는 그것을 받는 사람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알고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편지한 것인데, 그래도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그를 아는 데에서 더 자라 가라고 권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이제 그만하겠다. 그것은 그만하고 다른 일을 하겠다’ 하면 벌써 그 사람에게는 병이 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곁길로 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항상 어린아이로 유치한 생각과 유치한 행동만 하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별로 없으면 배교하는 일이 일어날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손쓰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요새 듣지 않습니까? 감리교에서는 그 신학교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고 가르치고, 다른 종교에도 진리가 있어서 서로 대화를 해야 하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데, 그런 교장, 그런 교수를 교회에서 어떻게 처치를 못하고 있습니다. 면직을 시킨다고 하지만 면직을 시키나 안 시키나 한번 주의해서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어떻게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겠습니까? 그런 일이 바로 우리 가운데 일어나고 있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분명하고 소상하게 알 것을 다 알고 있지 않으면 거기에도 다 이론이 있는 것입니다. 신학교의 교장이면 그것이 시시한 사람입니까? 다 준비가 있어서 말하는 것이고 대답할 말이 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하고서 우리 주님께 대해 바르게 알고 바르게 대답하고 ‘그것이 틀렸다’ 하고 그렇게 말할 만한 내용이 우리에게 있어야지 그것이 없이 희미하고 약해서는 학문을 도도히 한 사람들이 그 학문의 이름으로 그렇게 말하면 사회적으로 다 인정받은 사람들인데 어떻게 그것을 물리치겠습니까?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경륜은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고,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이 낮은 세상에 보내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리스도를 낮은 상태에 두신 것이 아니고 그를 높이시고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대강(大綱)이 그런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한 이 신약의 맨 처음 말씀처럼 하나님은 혈혈단신의 아브라함을 부르셨으나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대로 그로부터 많은 자손이 나와서 한 백성, 한 나라를 이루게 하시고, 다윗 왕국을 이루게까지 하셨습니다. 다윗 때에 와서 하나님은 또 다윗 왕국에 대하여 매우 은혜롭고 영광스러운 언약을 하셨습니다. 사무엘하 7:11 하반절부터 보면,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位)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존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였습니다. 다윗에게 영원한 왕국을 약속하시고, 다윗의 후손에게 견고한 왕위를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하나님은 이 약속을 기억하시고 유다 왕국을 보호하시고 유지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전 6세기에 이르는 동안 약 400여 년을 지나는 동안에 왕들이 우상을 섬기고 불의를 행하고 백성들도 왕을 따라서 우상을 섬기고 죄를 지으므로 나라는 자꾸 어두워지고 약해졌습니다. 죄에 죄가 쌓여서 나라가 그 죄의 무게를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에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보라,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였은즉 너희가 어찌 능히 형벌을 면할 수 있으랴. 면치 못하리라”(렘 25:2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요 예루살렘을 사랑하시지만 죄악까지라도 품고 용인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신 것입니다. 다른 나라의 신들은 자기 나라의 죄악도 용인하고 품을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죄악을 용인하고 품으시는 수호신이 아니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죄에 죄를 더하는 백성을 그냥 보호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아끼시는 것입니다. 죄짓는 유다 나라, 죄에 죄를 더하는 유다 나라를 그냥 두시면 ‘하나님은 죄악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는 말을 들을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아끼시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결코 그냥 보고 계시지 않으시고, 유다 나라는 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왕과 백성이 짓는 죄의 무게로 인해서 그 나라는 400여 년 만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모두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을 때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보다 먼저 주전 714년, 그러니까 130여 년 전에 아시리아의 산헤립이 유다를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포위하고서, ‘여러 나라를 정복한 나의 손에서 히스기야의 하나님인들 어찌 예루살렘을 구하겠느냐?’ 하고 아주 기고만장하여 떠들어 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정신이 바벨론의 느부갓네살과 그 후예들에게도 다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유다와 예루살렘이 다 그들의 손에 들어왔으니까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안중에 없었습니다. ‘내 손이 모든 나라를 정복하고 이 큰 나라를 세웠다’ 하고서 이스라엘도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무시하였습니다. 바벨론 나라의 역대의 왕들, 느부갓네살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왕들이 다 그렇게 높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과연 이 시대는 하나님의 통치와 다윗 왕국의 입장에서는 암흑 기간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니엘이 일어나서 느부갓네살 대왕의 꿈을 해석하여 ‘바벨론이 과연 큰 나라이지만 망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영원하리라’고 말해서 대왕의 교만을 꺾었습니다. 또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이 다니엘의 세 친구, 이 신앙의 세 용사 앞에 느부갓네살이 고개를 숙이고 그들의 하나님을 높이도록 만드셨습니다. 또 천하의 백성과 나라와 각 방언하는 자들에게 느부갓네살 대왕이 조서를 내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권세가 크고 그의 나라가 영구하리라고 선포했습니다. 그 시대에 그것이 꼭 필요했던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이 그만 무명무색하게 될 뻔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이 수난을 받았지마는 결국 높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는 또 다윗 왕국을 위해 해 주신 그 언약이 수난을 받는 시대였습니다. 나라는 망하고 왕은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70년의 포로 생활이 끝나고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라고 해서 주전 537년에 상당한 수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을 짓고 성벽도 쌓고 그렇게 국민 생활을 시작하였지마는, 다윗의 후손이 왕위에 오르고 나라가 튼튼하게 선 때는 그 후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시대까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냥 열강(列强)에게 속하여 식민 통치를 받아 왔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 왕국으로 말하면 이 기간은 암흑기였습니다.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537년이라는 장구한 기간이 나라도 없이 왕도 없이 흘렀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다윗의 계통이지만 무명무색하게 된,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 집에 왕 노릇 할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1-33). 당장은 예수께 왕위를 주신 것이 아니지만 예수께서 가실 길을 가신 뒤에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시고 그를 주시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동서로부터 많이 일어나게 되었을 때에 천사가 전한 말이 그대로 다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언약하신 바가 그대로 다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다윗에게 약속하신 그 후손이 왕위에 오르고 그 나라가 영원무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 예수를 거절하고 물러갔습니다. 예수께서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마 21:43)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이렇게 움직여 나갔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 12:2-3) 하고 약속하신 말씀이 이렇게 이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경륜의 움직임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11:30-31).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순종치 않다가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거절한 그때가 계기가 되어서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아서 구원에 이르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이 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뒤에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와서 불쌍히 여김을 받고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의지하여 사죄와 구원을 받음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세상에 역사의 큰 교훈을 남겼습니다. 다윗 왕국, 곧 유다 왕국의 멸망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선민일지라도 본질상 죄인이요 진노의 자녀요 다른 이방인들과 아무 다를 것이 없는 본질상 죄인이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선민이 된 것임을 만천하에 드러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를 가지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설 수가 없다는 것이 온 세상에 진리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역사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도다’ 하고 천하에 선언하는 것입니다.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을 길이 없고, 혈통이나 무슨 종교 의식을 잘 이행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받은 이래 다른 나라와 달리 하나님을 섬기는 의식을 예루살렘에서 계속해서 다 하고 지내왔고, 그래서 다른 나라의 백성과 다르다 하고 그것을 자랑으로 생각했잖아요. 그러나 그런 의식을 잘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지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이스라엘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에 오시고 그들이 예수님을 거절할 때에 하나님의 큰 진리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사죄를 얻고 구원을 얻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의지하여 되는 일이라 하는 이 진리가 세상에 크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많은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주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큰 진리입니다.

둘째는,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도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보고, 이제라도 깨닫고 돌이켜서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바라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전한 또 한 가지의 큰 교훈입니다. 자기의 동족 이스라엘을 향하여 안타깝게 부르짖는 것이 이것입니다. 이렇게 ‘여기 구원의 길이 있지 않으냐?’ 하고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을 사용하셔서 유대인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이방인들에게 경고의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계속 의지하지 않으면 너희도 유대인처럼 된다.’ 로마서 11:20-22에 보면,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희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께서 원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도 찍히는 바 되리라”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지 세상에 밝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비밀이었을지라도 이제는 그것이 비밀이 아니고 밝히 드러난 진리가 되었습니다. 여태까지 감추어졌던 것이 이제는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인류 역사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역사 철학의 대원리가 여기에 드러난 것입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 이 진리는 단순히 개인적인 구원의 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큰 경륜의 터 위에서 말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이것이 로마서 10:11-13의 말씀으로 바로 앞에 읽은 말씀 다음에 있는 말씀입니다. 다윗 왕 시대에도 이 진리는 진리였지만 아무도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어떤 선지자도 이런 말로써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진리는 진리일지라도 그때에는 아직 이 진리가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주라고 부른 다윗의 후손이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때에는 바울 사도가 이 진리를 힘 있게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가르친 것은 역사의 실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경륜을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친히 바울 사도를 보내셔서 이 진리의 말씀을 전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시여, 저희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께서 어떻게 큰 은혜를 가지시고 이 세상에 임하셨는지에 대하여 저희가 그 은혜를 더욱 깊이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죄인 된 것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고는 저희에게 소망이 없는 것을 바로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크신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서 오래전부터 예언된 자로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 모든 일을 이루시고 가실 길을 다 가시고 죽음의 어두운 골짜기도 고난의 골짜기도 지나서 마침내는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셨는지에 대하여 저희가 그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므로 저희가 굳게 믿고 흔들리지 않고, 언제든지 어떤 경우에 이르러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저희의 주님으로 믿고 고백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의 믿음이 요동하지 않게 하여 주시기를 구하옵나이다. 저희가 높이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부르므로 저희가 이 땅 위에서 살 때에 어떠한 행실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에 대해서도 성신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저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992년 1월 19일 주일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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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故) 최낙재 목사 약력  

m6_1_pic1.jpg1. 생애
1937년 전북 김제 출생
2010년 5월 9일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안식에 들어감

2. 학력
1966 - 1972  미국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신학학사, 석사학위
3. 경력
1972 - 1974  광주신학교 신학원 신약학 교수
표준신약전서 번역, 제작 참여
총회신학교, 합동신학교 교수

4. 목회 사역
1974 - 2010  독립개신교회 강변교회 주임목사
1985 - 1990  성약교회 주임목사
5. 저술
『하나님의 나라』 (1986)
『혼인의 신성함』 (1989) 
『구원이란 무엇인가』 (1993) 
『높이 되신 그리스도』 (2003)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보라』 (2007) 
『창세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전3권, 2008)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으니』 (전2권, 2008)
『출애굽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전2권, 2009)
『민수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전2권, 2009)
『신명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전2권, 2010)
『구원과 하나님의 나라』 (전2권, 2010)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 (전3권, 2011)
『요한일서 강해』 (전1권, 2011, 이상 성약출판사)
『영원한 안식과 주일』 (1997),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강해』 I(1999), II(2000, 이상 크리스챤다이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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